내 우연히 문학을 배우고 가르치며, 문학 속에 살아온 세월이 하마 고희에 이르렀다. 내 문학의 환경은 9살에 해방을 맞은 일제 말의 국어의 수난과, 북녘에서 남녘으로 피난한 혼란스런 교육환경 속에서 스산했다.
그러나 1년을 넘겨 다닌 몽금포수산중학교는 졸업 작품으로 단편소설을 한 편 써야 한다는 엉뚱한 전통이 있었다고 했고, 입학한 해의 여름, 아름다운 명사십리 앞바다에서 보낸 일주일 간의 해양실습은 매일 잡아 올린 까나리로 끊인 국 맛과 해양실습의 멋으로, 6ㆍ25 전쟁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마도로스가 아니면 해양 소설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해방이 된 해의 9월, 일본어 대신 처음으로 배운 조선어 시험에서, '구두, 모자, 보자기'를 외워 쓰는 문제에 '보자기'를 쓰지 못해 담임 한순창 선생에게 회초리를 세 대나 맞았던 부끄럽고 아픈 기억은 나를 국문학으로 인도한 국어의 원체험이었음에 틀림없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동향의 천재 시인 무애 양주동(梁柱東ㆍ1903~1977) 선생에게 배우며 자주 감격에 찼는데, 졸업반이던 1960년 뜻밖에도 무애 선생이 연세대 대학원장으로, 연세대 대학원장이던 영문학자 최재서(崔載瑞ㆍ1908~1964) 선생이 동국대의 대학원장으로 자리를 바꾸는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최재서 선생의 대학원장 취임 강연인 '세익스피아의 4대 비극론'은 잊을 수 없는 명강의로, '비교문학'이란 학문이 있다는 일도 이 때 처음으로 배웠다. 게다가 이즈음에 나온 그의 명저 <문학원론> 은 다음과 같은 문학론으로 특히 인상 깊었다. 문학원론>
"만약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있어 책을 두세 권만 가지고 피난을 떠나라 한다면 나는 어떤 책을 고를까? 내 전공인 <세익스피아 전집> 과 <옥스포드 영어사전> , 그리고 다른 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동란이 일어나, 과연 1950년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그 두 책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친구의 찝차에 편승하여 남하(南下)했다. 옥스포드> 세익스피아>
아무 주석도 없이 작은 영어사전만을 의지로 읽으니까 자연 골똘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이 작품들에서 이전에 맛볼 수 없었던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위안을 발견했고, 그래서 신산한 가운데서 산 보람과 또 살고 싶은 의욕을 느꼈다. 문학은 체험의 조직화이며 감정의 질서화이며, 가치의 실현이라는 이론이 추호의 틀림이 없는 진리임을 깨달았다."
'두세 권의 책' 이야기를 했지만, 두세 권의 책 못지않게 중요한 바는 예술 작품 또한 그림이나 조각품처럼 소유대상으로 삼아서는 토지나 아파트와 다를 것이 없고, 구체적인 체험의 문학이 중요하며, 좋은 체험이란 일상과 다른 삶의 경험을 말한다. 생명, 그것은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살라는 명령'일 터이기에.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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