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0년간 외국계 기업의 한국지사 최고경영자(CEO)로 일해 온 한 경영인이 본사에서 능력과 열정을 인정받아 한국법인 지분을 넘겨 받게 됐다. 외국계 기업의 한국지사 CEO를 하다 아시아 지역의 대표나 본사 임원으로 승진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아예 지분을 인수, 오너 법인장이 된 경우는 흔치 않다.
20일 다국적기업최고경영자협회와 업계에 따르면 일본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인 이소라이트는 최근 한국법인 지분의 상당 부분을 승수언(51ㆍ사진) 이소라이트코리아 사장에게 매각했다. 이소라이트는 섭씨 1,800도의 고온에도 견뎌내는 세라믹 내화 단열재를 생산, 일본 시장 점유율이 70%, 한국 시장 점유율은 40%나 되는 독보적인 기술력의 회사이다.
승 사장이 이 회사의 한국법인을 넘겨받을 수 있었던 것은 2년간에 걸친 끈질긴 설득의 결과였다. 승 사장은 한국에선 한국만의 경영법이 있기 마련인데 이를 일본 본사에서 수용하지 않자 독립을 꿈꿨다. 이소라이트 본사는 단 한 푼의 외상거래도 용납하지 않아 고객과의 신뢰와 의리를 공고히 할 수가 없었다. 한국적 상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본사 회계기준에는 어긋난다는 게 이유였다.
마케팅 차원의 접대도 인정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간 고객도 시장도 모두 빼앗기고 회사도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판단한 승 사장은 무려 180장이 넘는 슬라이드로 구성된 파워포인트를 들고 본사로 들어가 설득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소라이트 본사 임원진은 승 사장의 설명을 듣는 척도 안 했다. 이런 자료를 무려 20번이나 새로 제작,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그러나 1927년 오사카를 근거지로 해 문을 연 보수적인 이소라이트가 마음을 바꿀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한번은 무려 2시간동안 전화통을 잡고 울며 호소한 적도 있다. 달걀로 바위치기 식의 설득 작업이 소득 없이 끝나면서 승 사장은 마지막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렸다. 만화를 제작키로 한 것.
그 동안 상가집을 돌며 허드렛일을 다 하면서 거래선을 뚫은 이야기, 의욕적으로 일 하다가 본사의 거부로 좌절감에 부딪치며 회사를 떠난 동료들의 푸념, 한국법인을 독립시킬 경우 오히려 본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내용 등을 150여컷의 만화로 작성한 뒤 일본어로 번역해 본사로 보냈다. 그리고 승 사장은 드디어 지난달 한국법인을 넘게 받게 됐다. 언제 잘릴 지 모르는 외국계 기업의 월급쟁이 사장에서 일본의 본사와 어깨를 견주는 파트너가 된 것이다.
고교 졸업 뒤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간 승 대표는 도넛가게에서 일하면서 토론토대를 나온 뒤 132대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동양인 최초로 '밥콕&윌콕스'라는 캐나다 자동화 설비 회사에 입사했다. 이후 1989년 공장 자동화와 관련, 이소라이트를 방문했다가 승 사장의 친화력과 경영 능력 등을 눈여겨본 이소라이트가 함께 일할 것을 제의, 한국지사장이 됐다. 승 사장은 최근 16년간 연속 흑자를 냈고, 이런 와중에도 경영학 박사학위까지 받아 현재 경희대 겸임교수직도 맡고 있다.
지분 인수 후 회사 이름을 인슐레이션코리아로 바꾸고 비전도 '에너지 세이빙 파트너'로 새롭게 설정한 승 대표는 "꿈꾸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고 아침은 늘 설레는 법"이라며 "에너지 절감과 관련된 토털 솔루션을 제공하는 세계 최고의 회사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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