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에 의지하고 있는 김석환(40ㆍ부산시 반송동ㆍ지체장애 1급)씨는 요즘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멀리서 택시가 피해가는 것을 본 뒤로는 아예 바깥 출입을 끊었던 것. 그러나 최근에는 자유롭게 집에서 연산동에 있는 복지관에 나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난다.
표정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현대차가 사회적기업인 안심생활(사단법인)에 기증한 특수장비(이지무브) 차량을 이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김씨는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라며 "기업이 갖고 있는 기술로 저희까지 신경 써 주니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 모두에게 이동의 자유를
현대차에서 특수 설계한 차량이 장애인들의 발이 되고 있다. 현대ㆍ기아차가 사회공헌 활동으로 추진하는 이지무브 프로젝트는 현대차의 기술을 장애인용 차량에 적용, 교통약자의 이동을 돕는 사업이다. '모두가 동등하게 이동의 자유를 누리는 세상'이 이 프로젝트가 내건 슬로건.
현대차는 2006년부터 장애인용 시설을 갖춘 차량을 생산, 지금까지 672대를 기증ㆍ판매했다. '돈'이 되지 않지만 나라의 대표기업으로서 사회적 소수자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사업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애인의 교통 이동권은 철저하게 외면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설을 갖춘 차량을 찾아보기도 힘들 뿐 아니라 대부분 공업사 수준에서 필요에 따라 얼렁뚱땅 제작한 것뿐이었다.
일부는 일본에서 특수 시설만 수입해와 국내 차량에 부착해 사용해 왔다. 그러나 가격이 비싸고 차량에 장착하는 과정에서 안정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었다. 애프터서비스는 당연히 생각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 같은 어려움을 안 현대차는 2004년 국민들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 준다는 취지로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개발의 핵심은 현대차의 최고의 기술연구소인 남양연구소 시트시스템설계팀.
처음에는 일본과 독일의 장애인 차량을 뜯어보고 조립하는 시작했지만 2년 만에 스타렉스와 카니발 등에 휠체어 리프팅 등 특수 시설을 갖춘 차량을 내놓았다. 그동안 800만원 이상하던 일제 장비가 현대차 기술로 400만원 대에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격이 저렴해진 것뿐이 아니다. 기존 특장차와는 달리 기획 단계에서부터 설계 개발 양산에 이르기까지 차별화된 기술로 제작됐다. 지난해에는 가장 어렵다는 승하강 시트를 회전 기능을 더해 선보이기도 했다.
이기문(53ㆍ지체장애인 1급)씨는 "전에는 비싸게 주고 부른 특장 차가 타보면 덜커덩 덜커덩해서 불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현대 복지차를 타면 리프트 시설과 휠체어가 딱 아귀가 맞아서 일단 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라고 웃어 보였다. 김석환씨는 "장애인이 돼 안방 신세가 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며 "시설을 갖춘 차량이 더 많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현대차도 오는 2012년 까지 쏘나타를 비롯한 전차종에 장애인용 시설을 갖춘 특수장비를 탑재한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의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계획도 치밀하다. 자동차 산업의 특수성상 부품 업체의 동반 성장이 필수. 따라서 특장 장비를 전문 장착하는 업체 10여 곳을 육성하고 있다. 상생관계를 맺는 셈이다.
■ 장애인 보장구수리센터도 지원
현대차는 평소 장애인들의 발이 되는 보장구 수리센터 개설도 지원하고 있다. 장애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전동 휠체어, 스쿠터, 보청기 등은 그 동안 고장이 나더 수선정비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고칠 수 있는 기술을 갖춘 곳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다가 정비소까지 이동하는 것도 장애인들에게는 큰 일이다. 경제적으로 부담은 말할 것도 없다. 현대차는 이 같은 현실을 파악하고 지난 연말에 울산에 장애인보장구수리센터 개설에 1억5,000만원을 지원했다.
국민기초생활수급자에게는 15만원까지 현대차가 부품값을 지원, 돈이 부담되는 노약자와 장애인의 출입 문턱을 낮췄다. 또 휠체어 리프트를 갖춘 스타렉스 차량을 기증, 긴급출동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한마디로 노약자와 장애인을 위한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는 셈. 또 사정이 어려운 이들에게는 대여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 고령자와 어린이 등으로 길 넓힌다
현대차는 장기적으로 이지무브 차량을 단순히 장애인에만 국한하지 않고 어린이, 고령자를 아우르는 교통약자 편의 증진 차량으로 개발을 확대하고 있다. 고객중심의 차, 사람이 숨쉬는 차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대중 교통이라고 빠질 수 없다. 이를 위해 한국자동차성능시험연구소(KATRI)와 함께 '고령화 친화형 자동차'에도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 이미 2004년 처음 출시된 초저상 버스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초저상 버스는 장애인은 물론 어린이 노약자들에게 호응이 높다. 이미 전국적으로 2만8,000대가 보급됐다. 그러나 높은 가격이 대중화에 걸림돌이다. 일반 버스에 비해 수입부품이 많다 보니 가격도 2배 정도 비싼 것.
이 때문에 현대차는 토종 초저상 버스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 결과 지난 5월 부산국제모터쇼에서 선보인 신형 초저상버스는 편의성 부분에서 호평을 받았다.
특히 필요에 따라 차체 높이를 전자제어 서스펜션으로 80㎜ 정도 낮출 수 있는 닐링 시스템(Kneeling System)은 구미 선진국으로부터도 갈채를 받았다. 또 엔진 룸을 일반 시내버스와 동일하게 장착해 정비비용을 낮췄고 일부 부품도 국산화에 성공했다. 현대차는 앞으로 연구개발을 통해 가격을 20%이상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해 사회공헌 활동으로 504억원을 집행했다. 1,000명의 해외자원본사 등 해마다 2만명 이상이 자원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같은 사업 중 이지무브는 기업의 기술로 사회에 봉사하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영복(48) 현대기아차 사회문회팀 이사는 "현대차의 기술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이지무브는 프로보노 활동의 대표적인 예"라며 "앞으로 연구개발은 물론 관련 사회적 기업을 육성해 우리 사회가 근본적인 시스템을 갖추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라고 다짐했다.
송태희기자 bigsmile@hk.co.kr
■ 현대차 이지무브車 개발 '독수리 5형제'
이지무브 차량을 연구 개발하는 곳은 경기 화성시 현대차 남양연구소 시트시스템설계팀. 사내에서는 '독수리 5형제'로 불린다. 편종권(51) 수석연구원을 팀장으로 하는 5명인데다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이동차량을 연구하는 국내 유일의 연구진이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2004년부터 사회공헌의 관점에서 사회적 약자의 이동권을 넓힌다는'이지무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업 초기부터 연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편 팀장은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시장이 협소해 투자비용에 손실이 너무 크다는 의견도 있었다"며 "하지만 우리가 아니면 할 곳이 없다는 사명감으로 연구 개발에 착수, 성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시트시스템설계팀은 설계, 연구에서부터 충돌시험까지 일반 자동차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이지무브 차량을 개발했다. 장애인이 타는 차량이다 보니 안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서상만(42) 선임연구원은 "그동안 일본 제품과 독일 제품 등을 뜯어 본 것만 수 백 차례였다"며 "작은 연결 부위 하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 연구원들이 밤샘을 하기 일쑤였다"라고 말했다.
독일과 일본이 미리 선점한 각종 특허는 현대차의 연구 개발에 있어 암초로 작용했다. 정찬호 선임연구원은 "일본 업체들이 만들어 놓은 특허를 피해서 연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유혹도 있었다. 숨겨진 비화지만 현대차가 장애인 복지차량을 연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업체들은 "현대차가 개발을 하지 않으면 한국에 판매하는 가격을 20~30% 낮추겠다"라는 제안까지 해 왔다. 그러나 현대차는 이를 거절하고 2006년 '그랜드 스타렉스 이지무브'을 내놓았고, 지난해에는 신기술이 적용된 신형도 선보였다.
편 팀장은 "표준화가 완료되는 2011년 말까지 그랜드 스타렉스 외에 쏘나타, 그랜저 등 전 차종에서 이지무브 차량 연구를 완료할 계획"이라며 "이를 통해 그동안 현대차가 국민들에게 받았던 사랑을 교통 약자에게도 돌려 줄 것"이라고 말했다.
막내인 이미현 연구원은 "기업의 기술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매우 특별한 보람"이라며 "앞으로도 독수리 5형제를 지켜봐 달라"고 웃어 보였다.
송태희 기자 bigsmil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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