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주택가. 좁은 골목에 촘촘히 들어선 빌라들 사이로 지은 지 얼마 안된 4층 건물이 보였다. 문을 열자 유리문을 정성스레 닦고 있던 20대 여성이 "새 집 구경 왔어요?"라고 말을 건넸다. 이틀 뒤 '집들이'를 앞두고 손님맞이 준비로 분주한 모습이었다. 건물 안을 돌아다니며 뛰어 노는 아이들은 "내 방 보여줄게요"라며 손을 내민다.
지난 5월 말 이곳에 둥지를 튼 이들은 20~50대 여성 23명과 아이들 7명. 성인 남성은 한 명도 없는 이곳은 여성 노숙인들의 보금자리다. 2004년 4월 용산구 서계동의 월세 주택에서 문을 연 '열린여성센터'가 사회단체와 개인들의 따뜻한 기부 덕에 5년여 만에 어엿한 새 집을 갖게 된 것이다.
18일 저녁 7시에 열리는 '집들이'는 미뤄뒀던 이전개소식을 겸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도움을 준 이들을 초대해 고마움을 전하는 자리다. 이사 후 집 정리에 정신 없었던 서정화(49) 소장도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예전 집은 한 방에 5~6명이 자야 돼 발을 제대로 뻗기도 힘들었고 집도 낡아서 난방이 잘 안됐어요. 이제 널찍한 새 집을 갖게 돼 너무 기쁘고 감사해요." 서 소장은 지난 5년의 힘든 시절이 생각난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회복지단체인 '열린복지'에서 근무하며 서울역 근처에서 노숙하는 여성들을 상담했던 서 소장은 "여성들이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에 서울역 근처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쉼터를 열었다. 하지만 열악한 주거 환경은 둘째치고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해 겨울철이면 난방비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서 소장이 돌파구로 삼은 것은 작은 클래식 음악회였다. 개인 인맥을 동원해 결성한 음악단으로 2005년부터 3년 동안 개최한 음악회가 무려 37회. 이를 통해 모인 금액도 자그마치 1억원에 달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도 1억원을 기꺼이 후원해준 덕택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서 소장은 "노숙의 기억으로 가득 찼던 서울역 부근을 떠나 조용한 주택가로 들어오니까 식구들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며 흐뭇해했다.
이 곳에 머무는 여성들은 대부분 가정폭력이나 가난, 정신질환 등의 상처를 안고 길거리로 내몰렸던 이들이다. 최모(29)씨는 남편이 돈벌이를 찾아 전국을 떠돌게 되자 세 아이와 함께 센터를 찾았다.
2007년 센터에서 9개월 가량 머물다 떠난 뒤 지난 4월 다시 이곳을 찾은 그는 "매달 40만원 가까이 되는 방값 때문에 버틸 수가 없었다"면서 "남편과 아이까지 있는 여성은 어디를 가도 받아주는 곳이 없었는데, 이 곳이 유일한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김모(26)씨에게도 센터는 마지막 보루다. "노름빚을 잔뜩 진 아빠는 늘 술을 달고 살았고, 엄마는 가출해 버렸어요. 폭력을 휘두르는 오빠까지 가족은 남보다도 못한 존재였어요."
어렸을 때 뺄셈을 못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맞은 충격으로 김씨는 '계산' 공포증을 갖고 있어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19세 때부터 고시원이나 쪽방, 찜질방 아니면 길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던 김씨는 지난해 1월 센터를 찾았다.
김씨는 "3평 남짓한 공간에 5~6명이 머물렀지만 새벽 창가에서 한 줄기 바람을 맞으며, 꼭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무료로 병원 치료까지 받고, 숙식도 해결돼 너무 고맙다"며 "공공근로를 통해 돈도 벌면서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여성 노숙인을 위한 시설은 모두 6곳으로 수용 가능한 인원은 240여명에 불과하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보호막 하나 없는 거리에서 불안과 공포의 밤을 보내고 있다. 서 소장은 "지난해 겨울 입소 문의 전화가 쏟아졌지만 수용 인원이 한정돼 있어 거절해야 할 때가 가장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는 "여성 노숙인들이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만 서류상으로는 부모나 남편 등 가족이 있어 정부 지원을 받기 어려운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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