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년 6월 22일, 제주로 귀양간 추사 김정희가 부인에게 서찰을 보내 음식투정을 한다. '서울서 내려온 장맛이 다 소금 꽃이 피어 쓰고 비위를 면치 못하오니 하루하루가 민망합니다. (중략) 서울서 진장(陳醬)을 살 도리가 있으면 다소간 다 보내게 해 주세요.'(<완당평전> (유홍준 저) 중에서) 완당평전>
#45년 뒤(추사 임종 30년 뒤), 일본은 부산 신창동에 간장공장을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장이랄 수 있다. 일본에 의한 간장공장 설립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졌다. 시나브로 왜간장이 진간장(진장)으로 혼동되더니, 우리 고유의 간장은 조선간장, 국간장으로 창씨개명을 당하게 된다. 그뿐이랴. 해방 후에도 진(간)장은 진짜가 아니었다. 상술에 취한 기업들이 혼은 버리고 이름만 취했기 때문.
진장은 왜곡과 무관심을 딛고 용케 살아남았다. 올해는 첫 판매에 나섰다. 국내 유일의 진장 명인(농림수산식품부 지정) 기순도(60)씨가 38년 담아온 장맛 그대로다. 15일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의 장 익는 마을을 찾았다. 한가위 준비가 한창이었다.
다만 옹기종기 모인 장독 500여 개는 고즈넉하다. 100년 묵은 소나무 숲 그늘을 이불삼고, 담양의 명물 대숲을 베개 삼아 각기 다른 장(간장 된장 고추장 등)을 품은 채 가을볕을 쬐고 있다. 인근 풍수쟁이도 "장의 명당"이라고 했다는 자리다.
진장 독을 열었다. 미인의 머릿결마냥 검고 윤기가 흐르는데 맛은 진하고 향은 푸근하다. 일반 간장보다 풍미가 진중한 이유가 있다. 우리 간장은 농도와 숙성기간에 따라 햇간장(1년), 중간장(2~4년)으로 나뉘는데, 진장은 5년 이상 오래 묵은(陳) 장이다. 왕실과 반가(班家)에서나 맛보던 장의 으뜸이다.
기다림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다. 지혜와 비법이 버무려져야 한다. 기씨는 임진왜란때 의병장 고경명 장군으로 유명한 탐라 고씨의 후손으로 360년을 이어온 문중의 10대 종부(宗婦)다. "손에 물도 안 묻혀봤다"는 기씨 가문의 막내딸은 시집살이하며 장을 배운 뒤론 늘 손을 감춘다. 장에 스민 정성만큼 손은 밉게 변한 탓이다.
까다롭고 치밀한 과정 중 원료 고르기부터 짚어보자. "콩(100%국산 태광종)이 너무 크면 싱겁고 너무 작으면 뭉개지고, 짠맛을 내는 죽염은 3년 이상 묵은 대나무에 넣은 전남 신안의 토판염을 9번 구워내고, 물은 150m 밑의 암반수를 써야 한다."
메주는 동짓달(음력11월) 첫 말(午)의 날에 빚어내 아랫목 위(25~30도)에 매달고, 정월에 다시 날을 받아 장을 담근다. 부정 탈까 봐 액이 있거나 출산을 앞둔 처자는 얼씬도 못하게 했고, 금줄까지 달아 탄생을 알린다. 독마저 가정에서 장을 오래도록 품어본 독 중 "장맛이 좋았다"는 녀석들을 수소문해온단다.
진장은 한 단계를 더 거친다. 5년 넘게 일정한 염도를 유지하도록 햇간장을 조금씩 넣어줘야(첨장) 한다. 그쯤 되면 장은 마치 생명체처럼 너무 짜면 수정 같은 성에(소금결정체)를 만들고, 싱거워지면 성에를 녹여 자신을 조절한다. 기씨는 "10가지 중 1가지만 틀어져도 맛이 변한다"라며 "원체 귀하고 소량이라 팔 생각은 못했다"고 했다.
신세계백화점 바이어 덕분에 지난 설부터 시중에 알려졌고, 올 한가위엔 500세트(15만원)만 한정 판매하기로 했다. 우동숙 바이어는 "지난해 말 진장 독이 2개있다는 얘길 듣고, 설득해 상품화했다"고 했다.
진장을 제외한 기씨의 장류(된장 간장 청국장 고추장 등)는 이미 '기순도 전통장'이란 브랜드로 나와있다. 연 매출 10억원, 미국 연 수출 4만불, 중국 진출 등 꽤 알려진 명품이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든다"는 시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랐더니 어느새 업체 대표에, 나라가 인정하는 전통식품 장인까지 돼 있었다.
큰아들 고훈국씨와 딸 민견씨도 가업을 잇고 있다. 훈국씨는 "예전엔 간장 종지가 올라가야 상차림이 끝났다고 할 정도로 누구에게나 사랑 받았는데, 음식의 기본이 되는 우리 장맛이 잊혀져 가는 게 아쉽다"고 했다. 비싸다고 했더니 "외식 1번 줄이면 온 가족이 1년 먹을 장을 살 수 있을 텐데"라고 한다.
염도 문제도 섭섭하다. 짜게 먹지 않는 추세라 왜간장(18도)보다 염도가 높은 우리 간장(햇간장은 22도, 진장은 26~27도)은 발효라는 특별한 공정은 잊혀진 채 앉아서 손해를 본다는 것. 지난해 기씨의 명인 심사 때 좌중을 흔들었던 우문현답이 있다.
심사관: "진장, 이거 너무 짜서 어떻게 해요?" 기씨: "한 숟가락 넣을 거 반 숟가락 넣으면 되재라. 장을 배 부르려고 자시지(드시지)는 않으니께." 남들은 재수 삼수도 한다는 명인 심사를 그는 단반에 넘었다.
담양=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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