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 23일 아침,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는 국산 '아피스' 만년필을 준비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차입한 외화의 최종 상환 서류에 서명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7년 12월 3일 정부가 IMF 자금을 차입하는 서류에 서명할 때는 '몽블랑' 만년필이 사용됐었다.
아직도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97년 외환위기 직후 4년 간 한국은행에서 벌어진 긴박한 순간들을 생생하게 복기해 낸 책이 나왔다. 1978년 한은에 입사해 30년 동안 '한은맨'으로 지냈던 김학렬(사진)씨가 펴낸 <금리전쟁> . 금리전쟁>
김씨는 외환위기 직후 전철환 전 총재(작고)의 비서실장으로 발령 받아 4년간 동안 전 총재를 보좌했고, 이후 국제협력실장 경제교육센터소장 등을 역임한 후 정년 퇴직했다. 그는 "중앙은행의 올바른 위상정립, 그리고 제대로 된 이해를 돕고자 그 간의 기록들을 정리해봤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직후 IMF의 요구사항이었던 고금리 정책으로 많은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자, 정부는 최대한 빨리 기준금리(당시는 환매채(RP)금리)를 내릴 것을 공공연히 요구했지만 전 총재는 구조조정 촉진 등을 이유로 통화정책당국의 독립적 판단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며 외로운 싸움을 했다. 이 과정이 책에 소상이 기술되어 있는데, 저자는 당시 빠른 금리 인하 덕분에 경기가 빨리 회복됐지만 구조조정이 지연됐고 이후의 자산 버블 형성 등 문제점도 컸다고 지적했다.
외환은행에 대한 한은 출자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정부에 맞서 영리목적의 법인에 출자할 수 없다는 한은법 원칙을 지키려 했던 전 총재의 소신도 드러난다. 그런 측면에서 사실상 이 책은 '중앙은행 독립투쟁기'라고도 부를 수 있다. 또 정부와 한은 사이에서 일어났던, 그러나 일반에겐 잘 공개되지 않았던 각종 정책적 긴장과 갈등상황을 '다큐멘터리'처럼 기록한 최초의 저술이란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책에는 외환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돌파해 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일들도 빠짐 없이 기록돼 있다. 99년 10월 한은에 대한 국정감사 자리에서 한 국회의원은 "우리나라의 적정 외환보유액은 400억달러 수준인데 현재 보유액은 600억달러이니 한은은 200억달러의 과다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외환보유액이 2,600억달러인데도 "더 쌓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에 비춰보면, 외환위기를 맞은 지 겨우 2년 만에 600억달러가 너무 많다며 한은 총재를 질타하는 장면에 쓴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책의 중심 내용은 아니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전 총재의 생전 모습은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평소 주말이면 '프라이드'를 손수 몰고 다니고 자녀의 결혼식도 조용하게 치렀던 그는 이런 이임사를 남겼다. "사회지도층이 시장경제 구축을 위한 원칙을 주장하고 공동선을 강조하지만, 이런 것들이 기득권층의 집단이기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방패에 불과한 경우가 있다."
최근 '출구전략'을 둘러싸고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가 다시 쟁점으로 대두되는 상황이어서, 이 책은 더욱 관심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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