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 한 쪽에는 1그룹 <해운대> <국가대표> 라고 쓰고, 다른 쪽에는 2그룹 <박쥐> <마더> 를 쓴다. 그리곤 학생들에게 묻는다. 두 그룹으로 나뉜 영화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50 명의 학생이 빽빽이 들어찬 강의실에는 잠깐 정적이 내려앉는다. 언제나 토론에서 첫 번째로 얘기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마더> 박쥐> 국가대표> 해운대>
감독의 관점과 관객들의 관점
드디어 중간에 앉은 한 여학생이 손을 든다. "흥행이 된 영화들과 안 된 영화들."비슷하지만 정확하진 않다. 기록적인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는 1그룹의 영화들만은 못해도 2그룹의 영화들도 나름의 흥행을 했다. 특히 <마더> 는 300만 관객을 넘겼다. 마더>
다른 남학생이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한다.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이번에도 정확하진 않다.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라는 용어의 경계도 애매하고, 1그룹의 영화들을 일단 상업영화라고 규정할 순 있으나, 2그룹의 영화들을 확실하게 예술 영화라고 규정하기에는 영화의 규모가 너무 크다. 다른 학생은 "흥행을 위한 영화와 영화제를 위한 영화."1그룹의 영화도 영화제에 나가고 2그룹의 영화도 흥행을 한다니까.
조금 질문을 바꿔봤다. "1그룹 영화 중 한 편이라도 본 사람?"50명의 학생 거의 손을 다 든다. "그럼 2그룹 영화는?"반 정도의 학생이 손을 든다. 양 쪽의 흥행세와 비슷한 수치다. 이번에는 4편의 영화 중 감독 이름을 아는 영화를 물었다. <박쥐> <마더> 의 감독 이름은 영화를 보았거나 안 보았거나 학생 거의 전부가 알았고, <해운대> <국가대표> 의 감독 이름을 아는 학생은 영화 본 학생들의 반 정도였다. 국가대표> 해운대> 마더> 박쥐>
자, 그렇다면 다시 물었다. "두 그룹의 영화의 차이는 무엇인가?"이제 막 대답이 터져 나온다. "관객의 영화와 감독의 영화.""1그룹 영화의 이야기는 예측 가능하고, 2그룹 영화의 이야기는 예측하기가 어렵다."드디어 기다리던 대답이 나오기 시작한다.
결국 두 그룹 영화의 차이는 감독의 자의식이 영화의 이야기 속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의 차이이다. 1그룹 영화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관객의 정서적 만족을 겨냥해 전개된다. 초ㆍ중반의 유머와 후반의 감동은 필수적이다. 영화라는 시각 매체의 특성은 컴퓨터 그래픽이 책임진다. 가족 간의 사랑은 가장 확실한 정서적 엔딩에 봉사한다.
2그룹 영화의 감독들은 이야기 속에 자신이 보는 세계에 대한 자의식을 실현시킨다. 이야기는 관객의 예측과 기대를 교묘하게 배반하는가 하면 교묘하게 다시 조응한다. 관객에게는 일방적 정서적 만족만이 전달되진 않는다. 세상과 영화 매체에 대한 관객의 관점은 감독의 관점과 갈등하고, 화해하다 다시 대결한다. 가족들은 사랑하지만 동시에 가장 깊은 질투와 원한의 대상이기도 하다.
학생들에게 다시 묻는다. "만약 2그룹 감독이 <국가대표> 를 만들었다면?""도약에 대한 기대와 하강에 대한 공포, 승리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점철되는 스키점프 훈련과정 속에서 점점 선수들은 미쳐가다가 끝내 한 선수가 도약의 절정인 허공에서 스키를 벗어버리는 이야기…""그럼 1그룹의 감독들이 <마더> 를 만들었다면?""살인 누명을 쓴 아들을 구하려고 거대한 세상의 권력에 맞서는 시골 어머니가 시골 아줌마만의 유머러스한 기지로 끝내 아들의 누명을 벗기고 함께 부둥켜안고 울 때 관객도 함께 우는 이야기…"학생들은 총명하다. 마더> 국가대표>
감독의 자의식과 제작비 사이
그러나 나는 1그룹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가 막강한 정서적 호소력 속에서도 점점 이야기가 스테레오 타입화하는 게 불안하고, 2그룹, 한국형 작가주의 블록버스터 영화들 속에서 깊이 있는 감독의 자의식과 거대 제작비는 과연 계속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가 걱정이다.
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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