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북쪽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성북구 정릉3동은 상당히 독특한 동네다. 밀양 손씨를 중심으로 수백년간 이어진 토박이마을 '손가정'과 1969년 지어져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인 스카이아파트가 있고, 교회와 사찰, 굿당과 점집 등 온갖 종류의 종교시설이 촘촘하게 분포한다.
'산신제'라 부르는 마을 제사도 두 개나 전승되고 있다. 국민대와 고려보건대의 대학생들도 이 지역의 한 축을 이룬다. 좁은 지역 안에서 뚜렷한 특징을 지닌 다양한 집단이 공존하는 셈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이건욱 학예연구사 등 3명의 연구원들은 지난해 정릉3동 배밭골의 반지하방에서 10개월간 월세를 살면서 이 지역을 헤집고 다녔다. 그 결과가 최근 2권의 두꺼운 책과 DVD로 나왔다.
정릉3동의 도시민속 조사보고서인 <변화, 공간, 소통> 과 이 지역 가정의 물건을 조사한 <김정기 조성복의 살림살이> . 2007년 서울 아현동 편에 이은 국립민속박물관의 도시민속 조사의 두번째 성과물이다. 김정기> 변화,>
교통 요지로 전국의 사람들이 모여든 아현동이 다이나믹하다면, 정릉은 상당히 정적인 곳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풍수상 정릉이 자궁처럼 생겨서 이곳을 떠나면 망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대도시 한가운데서 수백년간 토박이들이 모여 살면서 산을 향해 제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를 입증한다. 책은 10월 초하루에 열리는 산신제의 준비 과정과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터뷰 등을 통해 산신제의 의미를 전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빈집'의 배경이 된 스카이아파트는 초창기 한국 아파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긴급대피가 필요하다는 안전진단 결과가 나와 일부 철거되기도 했지만, 50가구의 주민들은 아직 연탄을 때고 앞마당에 김장독을 묻어놓고 산다.
보고서는 공동체 외에 개인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도 눈을 돌린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징용을 갔다가 한때 야쿠자로 살았던 경로당의 노인회장, 고아원에서 자랐고 4·19 때는 교복 차림으로 시위에 참여했으며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며 산업현장 일선에 섰던 주민자치위원장, 대학생들의 벗으로 수십년을 살아온 순댓국집 아주머니 등의 삶이 세세하게 기록됐다. 88만원 세대 대학생들의 고민과 종교인들의 활동 양상도 담겼다.
그곳 사람들이 낯선 이들에게 쉽게 속마음을 열어보였을 리 없다. 이건욱 연구사는 "남의 지갑을 꺼내게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남의 과거와 상처를 끄집어내는 일"이라며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기도 하고, 주민들과 작은 공통점을 찾아가며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그간의 민속조사는 농어촌 지역의 전통문화에만 집중됐지만, 최근 민속박물관의 연구를 기점으로 재개발 지역 등 도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났다. 서울역사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지자체들이 지역의 현재를 기록하는 일을 시작했고, 서울시도 뉴타운 지역의 '과거 흔적 조성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해외의 대학과 박물관에서도 참관 문의가 오고 있다고 한다.
천진기 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은 "과거를 빨리 없애버리고 새로 만드는 일에만 급급했던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울산과 목포 등 지방 도시에 대한 연구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보고서는 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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