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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먼 사태 1년-한국 경제 얼마나 안전한가] <2> 환란과 리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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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먼 사태 1년-한국 경제 얼마나 안전한가] <2> 환란과 리먼 사이

입력
2009.09.15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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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21일. 임창열 당시 신임 경제부총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제통화기금(IMF)에 유동성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20여 일 전만 해도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여건)이 튼튼하다"(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던 말만 믿고 있던 국민들은 "외환 보유고가 텅 비어 IMF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정부의 고백에 허탈해 했고, 이듬해 IMF체제 하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2008년 10월22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다른 원인을 합치면 경우에 따라서는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불과 한달 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이후 전 세계 금융시장이 충격을 받았을 때도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2,000억 달러가 넘는다. 제2의 외환위기는 없다"고 자신했던 정부였다. 하지만 '리먼 쓰나미'는 우리나라 금융ㆍ외환시장을 뒤흔들었고 결국 우리 정부는 10월30일 미국과 3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 협정을 통해 가까스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와 지난해 글로벌 금융위기는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상당한 정도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정도차는 있겠지만, 결국 대외 여건이 악화되면 우리경제는 한 순간에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는 체질적 한계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것이다.

다행히 정부의 말대로 제2의 외환위기는 오지 않았고, 누구보다 빨리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예상 못한 외부쇼크가 가해진다면 우리경제는 언제 또다시 응급실로 실려갈지 모를 일이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리먼사태 즈음의 우리경제는 97년 외환위기 때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무엇보다 외환보유액은 세계 6위권으로, 은행들이 갚아야 할 대외 채무를 전부 갚아도 1,500억 달러가 남는 상황이었다. 은행들의 BIS자기자본비율, 기업들의 부채비율 등 각종 건전성 지표는 11년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된 상태였다.

하지만 초대형 태풍 앞에선 무력하기만 했다. 환율 폭등, 주가폭락 등 위기의 전개 양상은 그대로 재현됐다. 외환위기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넉넉한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었지만 환율 폭등에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고, 기업의 내용이 좋아졌다고 해도 주가는 외환위기 때만큼의 낙폭을 기록했다. 우리 정부가 그토록 강조해온 '펀더멘털'은 위기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우리가 충분한 외환보유액을 가지고 있음에도 외환 위기 직전에 간 이유는 우리 자본시장이 과거와 달리 개방돼 있다는 것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며 "우리 경제 자체에 문제가 없더라도 외국인들이 투자금을 한꺼번에 빠져날 수 있는 구조인 만큼 정밀한 모니터링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말대로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에 국한돼 일어난 외환위기와, 세계금융의 심장부인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돼 글로벌 경제를 동반 붕괴시킨 이번 금융위기는 그 파괴력 자체가 달라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도 있다.

하지만 두 번의 위기가 내용은 달라도, 결국 외부충격으로 시작돼 우리 경제를 뒤흔들었다는 점에선 같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대외의존도 높은 한국경제로선 결국 외부악재에 한없이 취약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그렇다고 대외의존도를 한꺼번에 줄일 수도 없는 일. 경제구조를 수출 중심에서 내수 위주로 바꿀 수도 없다. 개방의 빗장을 다시 잠그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은 '대외의존성' 자체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는 위기대응 능력, 경제적 방재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다시 위기를 맞지 않기 위해서는 과다한 가계 빚 관리과 장단기 외채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우리 경제가 세계에서 1등으로 위기를 극복하기 보다는 제대로 극복하는데 정책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위기극복에 도취할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제2, 제3의 리먼사태에 대비한 '대응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 맷집 세진 덕에 체감충격은 덜해

지난해 세계경제를 뒤덮었던 구름을 한국이 가장 먼저 걷어내고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로 전문가들은 '펀더멘털'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기초체력(펀더멘털) 덕택에 웬만한 충격에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른 나라보다 빨리 제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윤석헌 한림대 교수는 "지난해 금융위기 원인이 단기 외채 급증, 경상 수지 적자 확대 등 1997년의 환란과 닮은 꼴이긴 하지만, 지난해 금융위기는 맷집(펀더멘털)이 갖춰진 상태에서 받은 충격으로 체감 충격 정도는 환란 때와 천양지차"라고 말했다.

나라경제의 최후보루인 외환보유액의 경우 환란의 소용돌이가 몰아 닥쳤던 1997년말 가용재원이 20억 달러선까지 떨어져 사실상 곳간의 바닥을 드러냈지만, 리먼사태가 터졌던 작년 9월에는 2,391억달러로 증가했다.

또 기업부채비율은 97년 4분기 당시 424%에서 2008년 3분기 96%로 4분의 1수준으로 낮아졌는데, 이는 기업들이 그 동안 구조조정을 통해 내실경영에 주력함에 따라 위기면역력이 그만큼 강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강한 체력의 약발은 시장에 그대로 나타났다. 환율의 경우 환란 전 900원대에서 이후 1,900원대로 2배 이상 치솟았지만, 지난해 금융위기의 경우 위기 전 1,100원대의 환율이 1,500원대로 40% 가량 오르는 데 그쳤다. 또 위기 이듬해 경제성장률의 경우 1998년 -6.9%로 최악의 성적을 냈지만, 올해 경제 성장률은 -1.5% 혹은 그보다 훨씬 좋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한국이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밖에서는 여전히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배우'에 불과하다. '신인'일수록 기본기가 중요하듯이, 우리나라 역시 또 다시 닥칠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기초체력을 다지는 데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 藥이자 毒된 '환란의 교훈'

'1994년부터 3년간 경상수지는 물가와 성장률에 희생된 것이다. 대내 균형(물가)을 위해 대외 균형(경상수지)이 파괴된 것이다. 1996년은 물가를 희생해서라도 환율을 크게 올려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억제했어야 했다.'

강만수 경제특보(전 기획재정부장관)는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직접 현장에서'경상수지 적자 확대 → 단기 외채 급증 → 외환보유액 소진 → 외환 위기'를 목격한 결과였다.

10년 공백 뒤 기획재정부장관으로 화려한 컴백을 한 그는 대외균형에 대한 강한 확신 속에 고환율 정책으로 펴나갔다. 이른바 '최ㆍ강 라인'으로 불리던 당시 강 장관과 최중경 차관은 시장을 향해 연일 고환율 유도 발언을 쏟아냈다.

"지난 2년간 900원대 환율은 비정상적이었다" "최근 환율 상승은 수년간 고평가된 원화 가치가 정상화되는 측면이 일부 있다""환율을 시장에 온전히 맡길 수는 없다"등등.

정부의 고환율 정책을 등에 업고 작년 연초 930원대에 머물렀던 원ㆍ달러 환율은 순식간에 1,500원을 돌파했고, 과도하게 치솟는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달러를 쏟아 붓는 바람에 외환보유액 2,000억달러선마저 무너질 뻔하기도 했다. 더구나 급격한 환율상승으로 환헤지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한 중소기업들은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환란경험이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작용한 결과라는 평가를 내놓는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대외균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위기를 더욱 증폭시키는 촉매제가 됐다"며 "특히 오락가락 환율 정책은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를 크게 추락시켰다"고 지적했다.

외부적으로는 "한국은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라는 '낙인 효과'(Stigma Effect)로도 작용했다. 외환보유액 2,400억달러가 넘는 나라에서 70억달러 남짓 외국인 만기 채권 때문에 곳간이 바닥날 수 있다던 '9월 위기설'이 대표적이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금융은 신뢰와 같은 무형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소문이나 각종 설에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했다.

결국 환란의 경험은 이번 위기극복의 힘이 된 동시에 덫으로도 작용했다는 평가. 그때나 지금이나 두 번의 위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큰 왜곡만 없다면)환율은 시장이 가는 대로 내버려두라'는 사실이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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