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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상봉의 Fashion & Passion] <15> 피겨 '퀸' 김연아 한글을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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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이상봉의 Fashion & Passion] <15> 피겨 '퀸' 김연아 한글을 입다

입력
2009.09.15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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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2009 페스타 온 아이스'에서 선수들을 위한 의상 제작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처음 이 제안을 들었을 때 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망설였다.

당장 내 앞에 파리 컬렉션이라는 꼼짝없는 산이 놓여 있었고, 이 컬렉션이 끝나자마자 영국 런던 한국문화원에서 '한글=spirit' 전시가 계획돼 있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망설이게 만든 진짜 이유는 시간이 아니라 김연아의 '특별함'이었다.

그녀는 '국민 요정'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모든 이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또한 여태껏 적지 않은 무대의상들을 제작했었지만 피겨 의상은 처음이기에 걱정도 없지 않았다. 피겨 의상은 날카로운 스케이트 날을 딛고 올라 서 회전도 하고 몸을 움직여 연기도 해야 하는데 혹시 공연 도중 의상이 잘못되면 맞아 죽는 거 아냐? 하는 진담 섞인 농담도 했다.

하지만 나 역시 김연아의 팬이고, 디자이너로서 김연아에게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히는 것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라 찰나의 고민 후 흔쾌히 승낙했다.

이후 김연아는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역대 여자 싱글 사상 최초로 꿈의 점수인 200점을 돌파하는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매우 바쁜 스케줄 가운데 틈을 내 의상 가봉을 했다.

사전에 직원을 통해 사이즈를 체크했고, 이 사이즈대로 원래는 한 벌의 드레스를 제작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최종적으로 4벌의 피겨의상을 디자인했다. 약속한 시간에 김연아는 에이전트와 페스타 온 아이스의 관계자들, 그리고 2명의 남녀 경호원과 함께 역삼동에 있는 아틀리에로 찾아왔다.

이미 아틀리에에는 그녀의 가봉을 기다리는 4벌의 의상과 이를 준비한 직원들, 그리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보그와 W의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포토그래퍼들의 셔터가 터졌고, 이런 예상치 못한 플래시에 적잖게 당황했을 텐데 그녀는 프로답게 곧 바로 큰 웃음을 지어 보이며 기다리던 가봉이 시작됐다.

먼저 이번 공연을 위해 정해진 음악은 '팬텀 오브 오페라(오페라 유령)'였다. 우아하고 로맨틱한 분위기의 음악에 맞게 길이를 최대한 길게 할 것을 제안했다. 첫 번째 의상은 롱 화이트 드레스로 여기에는 핫픽스로 흘림체의 한글이 보석처럼 수놓아졌다. 그녀가 입고 나오자 모두의 입에서 '와' 하는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조형적인 백조처럼 보였다. 깨끗한 그녀의 이미지와 잘 어울렸다. 가봉을 하면서 내가 공연 때의 포즈를 요청하자 주저 없이 차에 가서 스케이트를 꺼내 신고 포즈를 취해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 주었다. 2시간 가까이 스케이트를 벗지 않고 진행된 가봉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진정한 피겨 선수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어 수백 개의 동그란 쉬폰들을 엮어 장식한 드레스도 입어봤다. 이 옷은 내가 파리 컬렉션에서 선보인 디자인으로 검은색에 화이트, 블루, 옐로우의 동그란 쉬폰 층들로 꾸며졌다.

이 장식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컬러플한 색을 드러내며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첫 번째 의상이 순수한 그녀와 잘 어울렸다면, 두 번째 의상은 연아를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운 은반 위의 새가 되게 해주었다.

마침내 그녀는 4벌의 의상을 모두 입어 본 뒤 그 중 이 두 개의 드레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번 공연을 위해서는 한글이 들어간 첫 번째 의상으로 결정되었다. 두 번째 드레스는 이후 8월 미셸콴과 함께 연기할 때 입었다.

가까이서 본 김연아의 모습은 서구적인 윤곽과 동양적인 선이 매우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정확한 프로포션의 몸매와 긴 팔과 다리는 피겨를 위해 더할 나위 없는 신체조건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대에서는 마치 감성적인 연기자처럼 천의 얼굴로 그녀의 연기를 더 드라마틱하게 전달하는 재능도 타고났다.

육체적으로는 매우 힘들고 테크닉도 어려운 동작들이지만 그녀를 통해 만들어지는 모습은 한없이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방울들을 빙판 위에 쏟아 냈을까.

드디어 '페스타 온 아이스'의 공연일이 되었다. 나는 스티븐슨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 미상공회의소 소장 그리고 W잡지의 이혜주편집장과 함께 초대받은 공연장을 찾았다. 도착해 나를 먼저 놀라게 한 것은 관객들의 열기였다.

그 엄청난 규모의 체육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아이스링크의 추위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할 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시작된 함성과 박수는 마치 대형 야외 운동장에서 열린 유명 가수의 콘서트 장을 방불케 할 만큼 거대했다. 우리들도 세계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는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 소리를 보탰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백스테이지에서 모든 선수들을 일일이 만나 볼 수 있었다. 이 공연에서 나는 김연아의 의상 말고도 그녀의 파트너인 조니위어의 의상, 그리고 참가한 모든 선수들에게는 한글로 디자인 한 티셔츠와 김연아의 여러 피겨 모습을 담겨있는 스카프를 선물하였는데, 한국을 방문한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한글로 어떻게 쓰여지나 보여주고 싶었기에 참가한 선수들의 이름 모두를 한글과 영문으로 장식해 넣었다.

공연 마지막에 모든 선수들이 이 티셔츠와 스카프를 입고 나와 피날레를 장식했고, 그래서인지 공연이 끝난 후 이 한글 티셔츠와 스카프는 '김연아 셔츠'와 '김연아 스카프'로 불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김연아와의 특별한 인연 후 지인을 통해 코치인 브라이언 오셔와도 만나게 되었다. 브라이언과 만나면서 그가 얼마나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선수시절 세계 챔피언이었던 브라이언이 유독 올림픽에서 만큼은 안타깝게도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서라도 김연아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내년 2월에 열리는 '2010 벤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그녀의 메달 소식으로 모든 국민과 함께 대한민국을 크게 외칠 날을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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