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5월2일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는데 나는 철원의 군부대 안에서 공공연한 부정선거를 체험했다. 그 때 철원에서는 여야 합해 모두 네 사람의 후보자가 나왔는데 군에서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하게 여당후보에 투표하도록 지침을 내렸던 것이다.
그 때 민간인들은 군부대에 들어올 수 없었고 투표 참관인도 군인이 섰다. 그리고 모든 장병들은 그 곳 후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했던 것이다.
투표하고는 참관인에게 보이고 가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소신대로 비밀투표를 했지만 이러한 부정선거를 고발하거나 항의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2년 뒤인 1960년에 3·15부정선거로 정권이 무너졌는데 그 부정의 싹이 이미 오래 전부터 크고 있었던 것이다.
철원에서의 군 생활이 반년 남짓 되었을 때 우리 부대는 4박5일 간 행군하여 양평 옥천으로 이동하였다. 여기만 하더라도 후방인데다가 나는 말단소대에서 중대본부로, 또 대대장 당번으로 자리를 옮겨 생활은 좀 더 여유로웠다.
대대장은 육사 9기의 김부만 소령이었는데, 이분은 부하들을 매섭게 다루어 모두들 무서워했으나 나에게는 잘해 주었다. 1974년 내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대령으로 예편해 부천에서 살고 있던 그 분을 사병생활을 같이 한 서정운 박사(재미 교수)와 함께 찾아 본 일이 있는데 얼마 뒤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1959년 5월25일에 1년 반의 군 복무를 마치고 옥천에서 제대했다. 그 뒤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철원과 옥천의 주둔지를 찾아 본 일이 있었다. 철원의 부대자리에는 아직도 부대가 있었으나, 옥천엔 부대가 아주 없어지고 그 산비탈에는 소나무만 무성했다.
내가 돌아와 우리 집은 다시 활력을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 병석에서나마 살아계신 것이 기쁨이었다. 그러나 집안 경제형편은 말이 아니어서 나는 어떤 결단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 동안처럼 현상유지 형으로 버텨 가다가는 집안경제도 나의 졸업 후 진로문제도 모두 실패할 우려가 크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과 의논하여 논 열 네 마지기(한 마지기는 495㎡) 가운데 다섯 마지기를 팔아 우선 빚을 갚고 나머지는 서울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졸업 후에 대비하기로 하였다. 말하자면 배수진을 치고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 할까.
그래서 나는 논을 팔고 그 돈으로 3학년 가을 학기부터 마포구 대흥동에 방을 얻어 비로소 학업에 전념하는 정상적인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때 박희범 교수를 찾아 대학교수로의 진로를 의논 했는데 대학교수가 되려면 대학원에 진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 없는 나로서 대안을 찾은 것이 한국은행 조사부였다. 그 당시로는 월급 받으면서 공부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공부도 한은 조사부 취업에 초점을 맞춘 경제학 공부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나는 열정을 가지고 학업에 집중했다. 잠자는 시간을 아끼다가 졸업 후 그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미거시경제학, 후진국 개발, 농업개발, 통화금융정책 등 경제 분야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서 헌법 민법 등 법률분야도 공부했다.
한은 시험과목은 논문 경제학 영어 상식 등 네 개였는데 과목별로 각 각 대책을 마련했다. 예컨대 논문의 경우 약 80개의 제목을 뽑아 논문을 써서 철을 만들었는데 실제 시험에서 나온 문제 세 개가 모두 그 속에서 나왔다.
1960년 3·15부정선거가 있었다.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당선 됐지만 부통령에는 여당인 이기붕 대신 야당의 장면이 당선 됐다. 그런데 이 선거가 부정으로 치러져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소요가 있었는데 4월11일 마산에서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바다에 떠오르면서 마산의거가 일어나고 이어 4월18일에는 고대생의 데모가 있어 온 나라가 뒤숭숭했다.
1960년 4월19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반정부데모는 전국에 확산되었다. 나도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에 평소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아침에 등교해 보니 모두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군대고 있었다.
사전계획 없이 자연스럽게 대오를 짓기 시작했으며 나는 그 맨 앞에 섰다. 500~600명쯤 되는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어깨동무를 하고 무작정 도심 쪽으로 달렸다. 대열은 종암동에 있었던 상대캠퍼스 옆을 흐르는 개천 길을 따라 성동역을 거쳐 광화문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우리는 광화문 국회(현재의 서울시 의회건물) 앞에 진을 쳤다.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콩 튀듯 하는 총소리가 나더니 피 흘리는 사람들을 싣고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달려가는 트럭과 구급차 등이 줄을 이었다. 사람의 피를 본다는 것이 그렇게 사람을 흥분시킨다는 것을 나는 처음 체험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이 흥분하고 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데모는 한때 수그러드는 듯 했으나 4월26일 300여 교수들의 시국선언과 침묵데모가 있었고, 그 다음날 데모대가 다시 서울을 뒤 덮었다. 그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내고 물러났으며, 4월28일에는 이기붕씨 일가가 권총자살 하는 비운의 사건이 있었다.
그 뒤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으나 우리 사회의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오랜 독재가 무너지고 난 다음의 과도적인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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