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웅
느티의 가계(家系)에도 내통이라는 게 있지
구석구석 푸른 구름을 거느리고 있지
이를테면 수화를 나누듯 잎을 뒤집을 때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이라고 발음하는 거지
그러면 구름이 말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지
저 너머 선산에서 할머니가 걸어 나오지
느티는 내게 몸을 기대며 슬쩍 정을 통하지
가령 난장(亂場)의 무대에서 걸어 나와 관객을 향해
혼잣말하는 사람처럼
그와 나 사이엔 이심전심이 있지 아버지가 뒤엎은 밥상처럼
바람이 쏴쏴 밀려나오지
그가 나와 내통할 때
내 몸의 물관과 체관을 오르는 게 있지
몰래 옷 갈아입다 들킨 누나들처럼
숨겨둔 자의식이 달아오르지
겨울에도 옷을 벗는 거지 느티는
잎들이 아니라도 무성한 거지
● 이 편안하고도 아름다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참 기분이 좋았다. 느티나무를 내면에 가지고 있는 시인이 우리 곁에 있어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도 했다. 나무에 기대서서 혹은 나무 밑에 앉아서, 니라면 나무에서 조금 떨어져서 생애의 기억들을 사유하는 순간이 너무나 다정했다고 할까.
내면화된 나무를 방 안에 들여놓고 서랍을 열어 잊혀진 옛 보물을 끄집어 내듯 조금씩 조금씩 기억을 곱씹는 일은 얼마나 달콤할까. 느티나무에게 '그'라는 인칭을 주고 오랜 벗과의 추억을 되새기듯 기억을 쓰다듬는 일은 또한 얼마나 즐거울까.
기억 속에 든 상처, 기억 속에 작은 기쁨들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마치 느티나무와 함께 동네 골목 작은 분식집에 앉아 떡볶이를 먹으며 도란거리는 것 같은 이 시. 그리고 드디어는 자신이 느티나무의 식구가 되는 이 풍경을 열고 사그라진 삶의 진풍경이 기어코 드러나고 마는 순간. 즐거운 생의 한 순간.
허수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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