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왓슨 지음ㆍ이수영 옮김/삼천리 발행ㆍ592쪽ㆍ2만6,000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미국 땅에서 두 남자는 강도살인죄를 뒤집어쓰고 전기의자에 앉아 사형을 당한다. 세계는 이를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했고 미국은 훗날 두 사람의 명예회복을 통해 잘못을 인정했다.
두 희생자 니콜라 사코,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신대륙 미국을 찾아 온 이탈리아 이민자였다. 각각 제화공, 생선장수로 일했던 둘을 사람들은 온화하고 따뜻한 인물로 기억한다. 사코는 가족을 성실하고 소중하게 대했으며 반제티는 문학과 친구를 좋아했다. 그들에게는 무정부주의자라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무정부주의에 공감했고 무정부주의 조직에서 활동했다.
사코와 반제티가 미국에 온 지 12년이 지난 1920년 4월 15일 사건이 발생했다. 매사추세츠주의 소도시 브레인트리에서 현금가방 강탈 사건이 일어나 경리 등 직원 2명이 살해됐다. 경찰은 총과 총탄을 갖고 있던 사코와 반제티를 용의자로 체포했다.
두 사람은 줄곧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신념을 보여주었다. 반제티는 감옥에서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 관용을 위해, 정의를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날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사코는 아들에게 "행복한 유희 속에서 젊음을 보내기보다 박해당하고 희생하는 이들을 도와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뚜렷한 물증이 없었지만 사형이 언도된 것은 두 사람이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공산주의 물결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이미 18세기말부터 인권, 노동운동이 고양됐고 진보주의 진영의 사회개혁 요구가 거셌다.
무정부주의자 역시 사회개혁 요구 운동에 적극 가세했고 사코와 반제티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진보진영의 요구가 거셀수록 반대편의 대응 또한 거칠었다. 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미국에서는 애국주의가 확산됐고 대대적인 좌익 검거 선풍이 불었다. 두 세력은 어떤 식으로든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보수세력은 사코와 반제티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두 사람이 무정부주의자이고 1차 세계대전 참전을 기피했다는 것만으로도 유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재판장은 "무정부주의자 놈들"이라고 내뱉고 "미국인이라는 애국심을 갖고 나라의 부름에 응한 진정한 군인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공공연히 강조했다. 심리는 증인들의 모호한 진술과 피고에 대한 유도 심문으로 일관됐으며 반대로 무죄 입증 증거와 알리바이는 채택되지 않았다.
유죄가 확정되고 처형이 임박해지자 미국은 물론 전세계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사형 반대 운동에 나섰다. 런던, 시드니, 베를린, 로마, 도쿄,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에서 시위가 있었고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버트런드 러셀, 마리 퀴리, 앨버트 아인슈타인, 업턴 싱클레어, 버나드 쇼, 로맹 롤랑, 이사도라 던컨 등 명망가들이 두 사람의 구명에 나섰지만 허사였다. 1927년 사형이 집행될 당시 사코는 서른다섯, 반제티는 서른아홉 살이었다.
이들이 실제 범인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유죄를 의심한다. 하지만 객관적 증거 없이 사상과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뤄진 처형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다.
한 이름처럼 늘 같이 붙어 다니는 사코와 반제티는 그 뒤 그림, 소설, 시, 노래, 드라마, 연극, 오페라, 영화, 다큐멘터리 등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고 50년이 지난 1977년, 마이클 듀카키스 미국 매사추세츠주 지사는 공식적으로 두 사람의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듀카키스는 사코와 반제티 사형 기념식에 참석해 "지금 이 사람들이 유죄냐, 무죄냐를 판결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사면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매사추세츠 주민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높은 수준의 정의가 사코과 반제티에게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책은 그로부터 30년 후인 2007년 미국에서 출판됐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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