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국내 정상급 여배우들 사이에서 미모와 인기의 잣대는 화장품 CF 출연 여부였다. 톱스타가 아니면 화장품 CF는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웠다. 요즘 여성 톱스타의 욕망을 부추기는 CF 아이템은 단연 청바지다. 화장품 모델은 예쁜 얼굴과 뽀얀 피부가 강조되지만, 청바지는 미모에다 몸매까지 따라줘야 한다. 섹시요정 이효리를 필두로 송혜교 하지원 손담비 김하늘 한예슬 등 한 몸매 한다는 톱스타들이 잇따라 청바지 모델에 합류했다. 한채영 신민아 박시연 등 늘씬한 각선미를 갖춘 신세대 여배우들도 뒤질세라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 청바지의 출발은 '섹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1800년대 중반 황금을 캐려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몰려든 사나이들에겐 튼튼한 작업복이 필요했다. 두꺼운 텐트용 천을 생산하던 레비 스트로스(Levi Strauss)라는 사람이 군납 알선업자의 요청으로 텐트 10만개 분량의 천을 생산했으나, 문제가 생겨 납품이 무산됐다. 실의에 빠져 주점에 들른 그의 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해진 바지를 꿰매는 광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텐트용 천은 산뜻한 작업복으로 탈바꿈했고, 실용성이 뛰어나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세계 최초 청바지의 등장이었다.
▦ 청바지는 오랜 기간 서부 사나이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고, 전쟁이 끝나면서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에도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을 통해 처음 소개됐다. 청바지 붐이 일어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 말론 브란도, 게리 쿠퍼, 제임스 딘 같은 배우들이 영화에서 청바지를 입기 시작하면서 반항하는 젊음의 표상으로 자리잡았다. 스타가 제품 판매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처음으로 인식시켜준 계기였다. '거친 남자'의 전유물이던 청바지는 전 세계 '청춘의 상징'으로 탈바꿈했다.
▦ 국내 청바지 CF는 오랜 기간 외국인 모델의 독무대였다. 서구 문화에 민감한 젊은 층이 즐겨 입는 옷인 데다 외국인 모델이 더 감각적이고 다리가 길어 세련돼 보인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국내 스타 파워가 세지면서 외국인 모델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청바지는 미국으로 대표되는 '문화권력'의 상징이다. 비록 리바이스, 캘빈 클라인 등 해외 청바지 브랜드의 파워는 여전하지만, 다리가 긴 외국인 모델을 밀어낸 토종 모델들의 경쟁력이 문화수용국가에서 문화전파국가로 변신한 '한류'의 한 축을 이루기를 기대해본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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