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볕이 제법 따가운 초가을 남한산성 숲 속은 온전한 가을이었다. 성 내부는 서울시내보다 기온이 5~6도 낮다고 한다. 남한산성에 관한 한 전문가로 통하는 임봉덕(56)씨는 "낮은 기온 때문에 꽃의 개화시기도 다른 곳보다 1~2주 늦다"고 말했다. 서울과 인접해 있지만 오염이 안된 지역이라 미생물의 분해활동도 활발하다고 한다. 서울시내 산에서는 낙엽부식이 7~8년 걸린다고 하지만 이 곳에선 1~2년이면 끝난다.
흙을 깨끗이 하는 지렁이도 많아 지렁이를 먹이로 하는 조류도 몰려든다. 남한산성이 수도권의 생태보고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해발 500m 높이에 대규모 분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주변부는 높아 진입하기 힘들고 중심부는 낮고 평평해 군사적 요충지로도 안성맞춤이다. 분지 외곽에는 성곽과 함께 소나무 숲이 드리워져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 주변에 송파신도시와 제2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있지만 오염물질이 쉽사리 유입되지 않은 것도 지형적인 영향이 크다.
산 초입에 조선시대 무기저장소로 추정되는 침괘정이 자리잡고 있다. 누울 때도 창을 베고 자야할 만큼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장졸을 지휘하던 곳으로는 수어장대가 있다. 병자호란 당시 굴욕의 역사를 오롯이 지켜봤던 한 맺힌 곳이다. 문화재를 잘 보존한 덕분에 주변 생태계는 잘 지켜졌다. 침괘정 옆 층층나무 앞에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몰려들어 진을 치고 있다. 나무 위에서 짹짹거리는 직박구리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인근에는 임금이 머물던 행궁이 있다. 인조와 소현세자가 47일 동안 기거했던 곳이다. 현재 복원공사중인 행궁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 쌓여있다. 10m 넘는 소나무를 그늘 삼아 대지에서는 형형색색 꽃이 만발했다. 보라색 닭의장풀, 빨강색 물봉선에 노란색 눈괴불주머니가 그 옛날 임금처소를 지키고 있었다.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듯 하트모양의 제비풀도 행궁 주위를 감싸고 있다.
생태학교 교사로 활동하는 이미숙(47)씨는 "깨끗한 곳에서만 발견되는 물봉선이 남한산성에 많다는 것은 이 곳 자연생태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역사와 꽃에 관심을 가졌던 이씨는 5년 전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증을 땄고 지금은 생태 가이드를 할 정도로 꽃 전문가가 됐다.
수어장대로 이르는 길에 들어서자 눈과 귀가 어지럽다. 양쪽 숲에서 튀어나온 다람쥐들이 길을 가로지르고 나무 위에선 새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잠시 앉아만 있어도 술이 깬다는 취성암에 앉아봤다. 맑고 차디찬 공기를 쐬다 보니 정말로 머릿속이 맑아졌다.
숲을 빠져 나와 성곽에 이르자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이 제법 많다. 가방을 멘 사람, 지팡이와 카메라를 든 사람, 벤치에서 쉬고 있는 노인들로 가득 차 산책길이 좁을 정도다. 전날 비가 온 뒤라 이날 시정거리는 정말 길었다. 잠실과 종로는 물론 하남 성남 구리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북한산도 보이네. 저거 개성 송악산이네." 저마다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성곽 길 옆 소나무 숲 속에서 파리풀과 애기나리, 거북꼬리, 국수나무, 이질풀 등을 유심히 관찰하는 등산객도 보였다.
바위 근처 소나무에서 동고비 한 마리가 나무를 타고 내려온다. 몸집은 작지만 성질이 난폭한 새다. 다른 새들과 달리 나무 위 아래로도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모습이 신기하다. 임씨는 "동고비는 남쪽지방에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경남과 전남 분들도 사진을 찍으러 자주 온다. 소나무를 돌아다니며 기생충, 진드기를 잡아먹기 때문에 생태계를 건강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중심축이다. 입구에는 수령 93년, 높이 12m의 거대한 소나무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소나무 군락지는 6만6,000㎡에 달한다. 수어장대 주변 소나무에는 솔방울이 너무 많다. 이미숙씨는 솔방울이 많은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다. "사람들이 많이 오고 사진을 많이 찍으면 나무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소나무가 본능적으로 번식을 위해 솔방울을 많이 만들게 되는 거죠."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국방 요충지로 역할을 하면서 사람들이 거주해 왔다. 많을 때는 성내에 우물 80곳과 물레방아 9곳이 있었다고 한다. 최근엔 이 곳 생물들도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겨울철새들이 꾸준히 텃새화하면서 개체수가 늘고 있다. 하지만 관리소홀과 폭죽놀이에 놀란 새들이 많이 떠나기도 했다.
경기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남한산성 안에는 문화재 못 지 않게 중요한 생태계가 잘 보존돼 있다. 문화재와 자연 생태계가 어우러진 남한산성의 가치가 빛을 볼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강철원 기자strong@hk.co.kr
사진=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 20년 '남한산성 지킴이' 임봉덕씨
"남한산성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20년 가까이 머물다 보니 문제있는 것은 바로 눈에 들어옵디다."
임봉덕(56)씨는 자칭 남한산성 지킴이 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남한산성 주변에서 머물며그 안에 있는 하나하나를 누구보다도 세밀히 지켜보고 있다. 5년 전에는 아예 산성 입구에 식당을 차리고 가족들과 함께 이사를 와버렸다. 지금은 산 구석구석에 있는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의 위치까지 모두 꿰고 있다. 새 박사로 알려진 윤무부 경희대 명예교수도 남한산성을 찾을 때면 임씨를 찾을 정도다. 전국의 내로라 하는 생태 전문가도 임씨에게 일단 자문을 구한다.
"처음 발을 디딘 게 1991년 4월로 기억됩니다. 이후 1년에 300일 정도는 남한산성 안에 돌아다녔습니다. 거의 미쳤다고 봐야죠." 임씨가 남한산성에 빠져버린 이유는 간단하다. 생태계의 보고이자 아직 때가 묻지 않은 청정지역이기 때문이다.
그가 전하는 남한산성의 생태계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지금까지 제가 발견한 조류가 검독수리, 붉은배새매, 뜸부기, 소쩍새 등 천연기념물 15종 포함해 122종이나 됩니다. 이렇게 많은 조류가 서식한다는 것은 이 곳 생태계가 그 만큼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한때 남한산성의 생태계도 위기를 맞았다. 등산객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는 매년 200만명 가까운 등산객과 50만대 정도의 차량이 찾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지자체에서 문화재 위주로만 정책을 펴고 있는 것도 생태계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최근 6~7년 동안 조류 15종이 이 곳을 떠났어요. 그러나 최근 솔부엉이가 돌아오며 차츰 원래상태로 돌아가고 있어요. 지자체에 부단하게 요구하고, 지자체도 관심을 갖게 된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불안하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보존이 잘 됐지만 앞으로가 문제입니다. 인간의 발길이 닿으면 필연적으로 생태계는 파괴됩니다.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등산로 정비가 시급해요. 도토리를 줍거나 나물을 캐는 것도 막아야 합니다."
그는 요즘도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 남한산성을 둘러본다고 한다. 어떤 때는 식당 손님들이 많아 일손이 딸리기도 하지만 산성내부를 둘러보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희귀 야생화 군락지와 조류 서식지가 혹시라도 훼손되지 않았을지 제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됩니다. 앞으로도 여기서 머물며 남한산성을 지키겠습니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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