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존재의 역설은 파괴다. '성형→조각과 상감→초벌구이→유약→재벌구이→24시간 냉각' 등 기나긴 정성을 다한 도공은 심드렁하게 자기를 깨뜨린다. 물정 모르는 중생이 입맛을 다시며 "싼값에라도 팔지"해도 귀머거리 시늉이다. 무수한 사금파리더미에서 건져 올린 완전무결, 그것이 청자의 미학이고, 장인정신이다.
기성품의 시대, 덤핑과 상술이 판치는 요즘엔 고루하다 못해 답답한 원칙일 터. 많이 팔아 돈만 많이 벌면 그만. 그런데 아직도 남들 눈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자가 있다. 그것도 기회 있을 때마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1. 1996년 다이어리 1만부를 만들었다. 초기 사업자금과 열정을 다 쏟아 부은 야심작이라 어렵게 뚫은 납품업체에 최고급이라고 떵떵거리고 왔는데, 삐뚤어진 실밥(마무리작업)이 영 거슬렸다. 직원들은 덤핑으로라도 넘기자고 난리다. 다 파기했다. 6,000만원이 사라졌다.
#2. 2006년 고객 항의전화가 왔다. 2월의 영문(February) 중 'e'가 'a'라고 다이어리에 잘못 인쇄된 것. 다른 소비자는 발견을 못했고, 기능엔 문제가 없으니 다른 제품으로 교환해주고 슬쩍 덮자는 의견이 나왔다. 웬걸 아직 안 팔린 건 수거해 없애고, 각 매장에 지시해 사간 고객을 수소문했다. 이례적으로 회사 홈페이지에 리콜(recall) 안내문까지 올렸다. 1억원 넘게 까먹었다.
도무지 융통성이라곤 없어 보이는 이 회사는 이름마저 완전함 오롯함의 옛 우리말(오롬)을 쓴다. 사장이 "사명이 너무 세다"는 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었다. 어지간히 깐깐할 법한데 이호열(54) 오롬시스템 사장의 인상은 오히려 푸근하다.
회사를 거덜 낼뻔한 '자발적 파괴'의 뒷얘기가 궁금했다. "폐기하고 다시 만드니 직원들도 최선을 다하더라. 새로 낸 제품은 통신판매로 3,000~4,000부 팔았는데 정말 반응이 환상적이었다. 주문이 밀려들어서 8,000세트나 더 팔았다"(사례 1), "신뢰와 고급 이미지가 부각되면서 1억원 이상의 광고효과를 봤다. 이후 롯데백화점 본점과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매장을 내달라는 연락이 왔다."(사례 2) 전화위복인 셈이다.
오롬시스템은 원래 다이어리가 주력인 문구업체다. 1980~90년대야 연말연시 선물로 다이어리가 으뜸이었지만 정보기술(IT)기기의 발달로 요즘엔 뒷방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장은 인간의 두 가지 욕구를 꿰뚫고 있었다.
"기록하고 싶은 열망, 명품을 갖고자 하는 욕심은 변치 않는다"는 것. 그는 "핸드백 액세서리 등 명품이 주로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반면 남성용 고급 잡화는 한정돼 있다"라며 "남성용 명품의 지향점은 결국 고급 비즈니스 문구"라고 했다. 다이어리뿐 아니라 책상에 놓는 용품(연필통 등)부터 해외출장 때 쓰는 소품(여권 가방, 여행용지갑 등)까지 무궁무진하단다. 오롬시스템의 생산품목은 500가지가 넘는다.
고급 문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경복고와 서울대(사회대)를 나온 그의 꿈은 본디 학자였다. 그러나 대학원에 다니던 80년 '서울의 봄' 이후 3년 가까이 시국사범으로 징역을 살면서 삶이 바뀌었다. "전두환 신군부 덕에 팔자에 없는 사업을 하게 됐다"고 웃는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서울대 한 켠에 마련한 4평짜리 복사집이 시작이었다. 사정 어려운 학생들의 복사를 외상으로 때워주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장사가 될 리 없었다.
인쇄로 영역을 넓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데이터전환시스템 개발로 전자출판 초창기에 두각을 나타내긴 했지만 인쇄업종이 워낙 전통산업이라 어려움이 많았다. 더구나 뒷거래가 워낙 많아 오로지 품질로 승부하고 싶었던 그의 성미엔 맞지 않았다.
이왕 들어선 길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체 브랜드, 자체 상품으로 승부를 걸었다. 공부도 하고 해외도 다녀보니 결론은 몽블랑 같은 고급 문구였다. 96년 처음 출시한 다이어리가 2만7,000원, 당시 다른 제품(1,500원~2,000원)보다 10배 이상 고가였다. "미쳤다"는 세간의 비웃음은 잊고 오로지 품질과 정직으로 일관했다.
덕분에 초기 통신판매를 제외한 대부분의 계약은 다른 제조업체와 달리 상대가 먼저 제의를 해왔다. 교보문고, 신세계센텀시티 등 현재 매장은 15곳에 이른다. 일본 관광객의 눈에 들면서 올 7월엔 3억원 규모의 수주도 받았고, 내년엔 일본 지사 설립도 검토 중이다. 최고의 품질을 위해 당장 돈을 더 벌 수 있는 주문자생산방식(OEM)은 정중히 거부했다.
직원 40명, 연 매출은 60억원 수준, 그나마 순익 7억~8억원은 모두 연구 개발에 쏟아 붓는다. 철저한 '다품종 소량생산', 회사를 키울 생각도 없다. 그가 꿈꾸는 '큰 회사'는 상식과 다르다. 설명해달랬더니 편지얘기를 꺼낸다.
"우리 제품을 비싸게 샀는데 이음새가 찢어졌다고 혼내는 편지였죠. 답장을 했죠.'현재 기술로선 어렵지만 노력하겠다. 일단 다른 제품으로 바꿔주겠다.' 그랬더니 답이 왔어요. 시장 통에서 일하는 저에게 사장이 직접 편지를 써주는 회사라면 믿을 수 있다고. 사람 사는 맛을 느꼈죠. 돈 세는 재미 저리 가라죠." 규모보다 정신이 커야 큰 회사라는 얘기다.
그래서 입버릇처럼 자신과 직원들에게 묻고 답한다. "소비자가 모를 것 같아? 다 알아! 눈 가리고 아웅 하지마!"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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