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와 가상을 막론하고 세상에서 가장 수다스러운 이야기꾼은 누구였을까? 대뜸 떠오르는 이들은 발자크나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다산성 작가들이다. 그러나 다산성에선 이들에게 뒤질지 몰라도 이야기의 형식적 내용적 다채로움에서 이들을 앞서는 이야기꾼이 있다. 여자다.
아랍 설화 <천일야화> (千一夜話·알프 라일라 와 라일라) 속에서 이야기꾼으로 설정된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비 셰헤라자데(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방언들에 따라 이 이름은 여러 이형태를 지닌다. '셰헤라자드'만큼 널리 알려진 형태가 '샤라자드'다. 여기선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셰헤라자데'를 취하기로 하자). 천일야화>
흔히 <아라비안 나이트> (초기 영어판 초역본 제목에서 유래했다)라고도 부르는 <천일야화> 는 중세 이슬람 문명의 정화(精華)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학적 보고(寶庫)다. 이 설화집 속 수백 개 이야기의 화자가 셰헤라자데다. 천일야화> 아라비안>
<천일야화> 가 몇 개의 이야기로 이뤄졌는지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본이 여럿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천일야화> 전체가 거대한 액자소설이기 때문이다(소설의 정의를 엄격하게 내리자면 <천일야화> 를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이야기'라는 의미로 느슨하게 사용해 이 아랍 고전을 전근대 소설로 보기로 하자. 그러나 <천일야화> 는 그 생성 연대와 배경이 전근대 사회일 뿐, 부분적으로 '초현대적' 소설기법들을 자유자재로 채용하고 있다). 천일야화> 천일야화> 천일야화> 천일야화>
알다시피 액자소설이란 액자의 틀 속에 사진을 넣듯, 한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들)를 끼워 넣은 형식의 소설을 말한다. 액자소설에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천일야화> 는 간단한 형식의 액자소설이 아니다. 거기에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만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 속의 이야기(들) 속의 이야기(들)도 있다. 천일야화>
셰헤라자데의 이야기 속에 수많은 이야기꾼이 등장하고, 더러는 그 이야기꾼의 이야기(들) 속에 다시 이야기꾼(들)이 등장하는 일이 예사다. 그러니까 <천일야화> 라는 거대한 액자의 틀 안에는 수많은 액자들이 끼워져 있고, 그 액자들의 일부는 또 더 작은 액자들을 품고 있는 것이다. 천일야화>
<천일야화> 라는 거대한 액자소설의 화자(들)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가장 바깥 틀 바로 안에서 매일 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셰헤라자데다. 셰헤라자데가 천하룻밤에 걸쳐 남편 샤흐리야르에게 이야기들을 들려주게 된 사연이 액자소설 <천일야화> 의 맨 바깥 틀이다.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간단히 되새겨 보자. 천일야화> 천일야화>
아득한 옛날 인도와 중국의 일부까지도 다스리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왕이 두 왕자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두 왕자 가운데 형 샤흐리야르가 왕위를 이어받았고, 동생 샤흐자만은 제국의 변방 사마르칸드의 왕이 되었다.
스무 해 뒤 형은 아우가 보고 싶어 사신(使臣)에게 사신(私信)과 수많은 선물을 들려 보내 아우를 수도로 초대했다. 아우 샤흐자만은 형의 초대에 기쁘게 응해 사마르칸드를 떠나기 직전, 제 아내 곧 왕비가 궁중요리사와 간통을 하는 걸 목격한다. 그는 분노에 차 그 두 사람을 칼로 네 동강이 낸 뒤, 우울한 상태에서 형을 방문한다.
그런데 샤흐자만은 형 샤흐리야르의 궁전에서 형수 역시 더 음란하게 간통을 하는 걸 목격한 뒤, 괴로워하다 이를 형에게 알린다. 제 눈으로 직접 아내의 간통 현장을 본 샤흐리야르는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동생과 함께 왕궁을 빠져나온다.
형제는 얼마 뒤 바닷가 나무 밑에서 마신(魔神)과 그의 아내를 보게 되고, 마신이 자는 동안 그 아내의 협박에 굴복해 그녀와 몸을 섞는다. 그녀에게 희롱당하면서 샤흐리야르 형제는 세상의 모든 여자는 부정(不貞)하다고 믿게 된다.
샤흐리야르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와 동생과 작별한 뒤, 아내를 처형하고 무서운 결심을 한다. 매일 처녀를 왕비로 맞아들인 뒤 하룻밤만 자고 이튿날 새벽에 처형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짓이 계속되기를 3년여, 민심은 황폐해지고 하룻밤 왕비가 될 처녀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마침내 자파르라는 대신의 딸 셰헤라자데가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비를 자원한다.
셰헤라자데는 잠자리에서 왕에게 마지막으로 동생 두냐자드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왕의 침실로 불려온 두냐자드는 언니에게 긴 밤을 보내기 무료하니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셰헤라자데가 집을 떠나기 전에 동생에게 그리 일러둔 터였다. 이렇게 해서 장장 천하룻밤 동안 이어질 셰헤라자데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셰헤라자데가 처형되지 않고 매일 밤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왕이 그녀의 이야기를 지루해 하는 순간, 그녀의 목숨은 위태로워진다.
그녀는 그 다음 얘기가 더 재미있다고 왕에게 암시하거나, 날이 밝아오는 순간과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포갬으로써, 왕으로 하여금 '하룻밤만 더 듣자, 하룻밤만 더 듣자' 되뇌며 그녀를 처형하지 못하도록 한다. 천하룻밤이 지났을 때, 왕은 자신의 살육 행위를 반성하고 셰헤라자데를 평생의 동반자로 삼는다.
<천일야화> 의 액자소설적 특징은 이야기의 처음부터 약여하다. 자파르는 큰딸 셰헤라자데를 만류하기 위해 '황소와 당나귀 이야기'의 스토리텔러가 되고, 셰헤라자데가 왕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얘기 '상인과 마신(魔神)이야기'가 세 개의 또 다른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다. 천일야화>
이야기는 단지 이어질 뿐만 아니라 속으로, 거듭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겉으로, 거듭 겉으로 나오기를 되풀이한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비극과 희극이, 풍자와 패러디가, 에로스와 마술이 접혀지고 펼쳐진다.
<천일야화> 가 그리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슬람세계다. 그 세계의 중심은 바그다드다. 완역에 가까운 최초의 영역(英譯)은 19세기 말 영국의 외교관 겸 동양학자 리처드 프랜시스 버튼의 손으로 이뤄졌다. 천일야화>
국내외의 <천일야화> 상당 부분은, 초역이든 완역에 가깝든, 이 버튼 번역본의 중역이다. 버튼 번역본은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한 뒤, '인정 많고 자비로우신 알라의 높으신 이름으로!'라는 표제의 제사(題詞)를 달고 있다. 천일야화>
그 제사는 "알라를 찬양할지어다! 인자하신 왕, 우주의 창조주시며, 삼계(三界)의 제왕, 기둥 없이 천계(天界)를 세우신 어른, 침대와 같이 평평한 대지를 펴옵신 어른을 찬양할지어다! 우리의 주 모하메드, 사도들의 제왕, 그 겨레 위에 신의 은총과 축복을 내리소서.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신의 변함없는 은총과 축복을 베푸소서. 오! 삼계를 다스리시는 임금이시여!"(범우사판 <아라비안 나이트> , 김병철 역)로 이어진다. 아라비안>
<천일야화> 의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가 사산조 페르시아 때 페르시아어로 편찬된 <천 개의 이야기> (6세기경)라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의 아이러니다. 페르시아인들은, 7세기에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해 이슬람교를 믿게 되기 전까진, 조로아스터교를 믿었기 때문이다. 천> 천일야화>
오늘날 이란은 이슬람세계의 구심점 가운데 하나지만, 아랍 세계는 아니다. 언어의 족보도 완전히 다르다. 현재 페르시아어는 대체로 아랍문자를 차용해 표기되지만, 아랍어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셈어군(群)에 속하는 것과 달리, 페르시아어는 인도-유럽어족의 인도-이란어군에 속한다.
<천일야화> 는 이슬람교 이전부터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인도 지역에서 전승돼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수많은 설화들의 아랍어 번역판을 뼈대로 삼고, 이슬람 이후의 이야기들을 살로 붙여 만든 것이다. 천일야화>
전체 이야기가 현재의 꼴로 완성된 것은 15세기께 이집트 카이로에서고, 유럽인들에게 처음 소개된 것은 1704년부터 1717년까지 열두 권으로 번역돼 나온 프랑스어판을 통해서다. 역자는 동양학자 앙투안 갈랑이었는데, 그는 아랍어 텍스트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들은 이야기도 제 번역본에 포함시켰다.
예컨대 <천일야화> 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라 할 '알라딘의 램프'나 '알리 바바와 40인의 도적'은 본디 아랍어 텍스트에 없던 것을 갈랑이 임의로 집어넣은 것이다. 그는 알라딘이나 알리 바바 이야기들을 시리아의 한 이야기꾼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들은 프랑스어판에서 다시 아랍어로 번역돼 <천일야화> 에 포함되게 되었다. 천일야화> 천일야화>
버튼 영역판에 따르면 셰헤라자데는 역대 군왕전, 옛 나라들의 연대기, 여러 가지 전설에 정통했으며, 옛 사람들의 문화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탐독했다.
또 사서(史書)를 많이 수집했고, 많은 시를 외고 있을 뿐 아니라 철학과 과학,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이상적인 이야기꾼이다. 다음 생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꾼 아내와 살고 싶다. 그래서 밤만이 아니라 낮에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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