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하고 일상적인 기부를 통해 선행을 하나의 쿨하고 세련된 라이프스타일로 정착시키고 있는 20ㆍ30대의 모습은 참신한 충격이다. 2030은 그 어느 세대보다 이기적이고 소비지향적이며 실리적이라고 지탄받던 세대다. 그런 세대가 '착하다'를 '쿨하다'의 동의어로 만들며 그 정의를 정치ㆍ사회적 함의로까지 확장시켰다. 무엇이 그들을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로 만들었을까.
조한혜정(61)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사회적 기업 오르그닷의 김진화(33) 대표,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의 박미경(34) 나눔팀장과 나눔대사를 맡고 있는 개그맨 정현수(30)씨가 9일 서울 남대문로 한국일보 회의실에 모였다. 2030의 기부 붐은 자기과시욕,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다양한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도 시장도 실패한 무방비의 승자독식 사회를 자생적 '돌봄 체계'로 돌파하려는 젊은 세대의 욕구가 터져나온 것이라는 게 참가자들의 견해였다.
-기사가 나간 후 20ㆍ30대의 뜻밖의 착한 모습에 놀랐다는 반응이 많았다. 왜 2030이 일련의 착한 트렌드의 선봉에 서게 된 걸까.
박미경 "기부에 대한 20, 30대의 무의식적 학습효과가 컸다고 생각한다. 2030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전 세계 빈곤아동을 접했고,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TV 기부 프로그램에도 자연스럽게 노출됐다. 또 자의든 타의든 학교에서 불우이웃을 돕자고 하면 쌀도 가져다 내고 폐지도 가져다 내면서 자연스러운 학습이 이루어진 것 같다."
김진화 "기술적 요인 덕이 크다.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프로그램은 집에 누워서 전화 한 통으로 기부를 할 수 있도록 기부의 방법을 혁신시켰다. 이어서 나온 온라인 소액 기부는 정말 쉽게 기부를 할 수 있게 만들었고…. 기부가 굉장히 가까워진 느낌이다."
정현수 "우리 젊은 세대는 있어 보이는 걸 중요시한다. 아무리 꾸미지 않은 여자도 샤넬 백 하나 딱 매주면 끝난다.(일동 웃음) 츄리닝을 입은 남자도 벤츠 하나 타주면 끝나는 거다. 기부도 마찬가지다. 내면을 명품화 시키는 거다. 친구가 '너 기부도 해?' 물으면 왠지 '난 명품남이야' 하는 느낌이 든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면서 자기 만족이 생기는 거다."
조한혜정 "양 측면이 모두 존재한다고 본다. 나도 학교에서 1학점짜리 사회봉사 수업을 하나 하고 있는데, 수강 경쟁이 대단하다. '아니, 얘들이 왜 이렇게 착하지?' 의아했다. 그 중엔 소위 스펙 쌓기의 일환으로 온 애들도 있고, 진정성에서 우러나와 사회봉사를 하는 애들도 있었다. 2030은 명품을 아는 소비세대다. 누가 명품백 하나로 자신을 차별화하면 전체가 따라가는 현상이 나타난다. 기부도 누군가 명품소비와 같은 의미로 차별화해 실천하면 그걸 또 따라 하면서 사회가 착해지는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승자독식구조가 고착되고 있는 고도 경쟁사회에 대해 '이렇게 가면 세상이 제대로 되겠냐, 전면적 방향전환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느끼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개인의 월급이 많게는 100배 이상 차이 나는 사회다. 이런 식으로 가면 승자도 패자도 못사는 세상이 오겠구나, 나누는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인식이 젊은 세대에게 생긴 것이다."
-연예인들의 선행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국내에도 안젤리나 졸리 같은 스타들이 급증했다.
정현수 "주변에 선행 연예인들이 많아지다 보니 동료들끼리도 기부나 선행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너도 해봐' 권하는 분위기가 됐다. 물론 우리도 상품이기 때문에 좋은 이미지를 갖기 위해 마케팅 차원에서 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진정성이 훨씬 크다."
조한혜정 "지금은 트렌드 시대니까 그런 것도 나쁘지는 않다. 안 하는 것보다 낫고….(웃음) 연예인들의 선행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이 붐을 이뤄서 파급효과가 생기는 것도 좋다고 본다. 오히려 학교 근처에 연예인 이름으로 국수집을 열어 수익을 기부하는 식으로 기부 방식을 좀 다양화해 보면 어떨까. 훨씬 파급력이 클 것이다."
박미경 "실제로 정혜영, 션 부부나 한비야씨 같은 유명인들이 방송에 나오면 다음날 기부율이 쑥 올라간다. 엄청난 영향력이다."
-2030의 소액기부가 적은 돈으로 윤리적 허영을 채우는 위선이라는 비아냥도 있는데.
정현수 "자기 분수대로 편안하게 하는 거다. 기부할 때 액수에 대한 부담감은 별로 없다. 오히려 너무 많이 하면 시청자들이 '많이 벌지도 못 할 텐데 저렇게 많이 했어?' 걱정하지 않을까."(웃음)
조한혜정 "돈, 돈, 명품, 명품 하던 시대는 정점을 찍은 것 같다. 명품이 대중화되면서 물건으로 과시하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윤리적으로, 사람답게 살고 있나,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고민들이 생기면서 그게 기부 붐으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스펙 쌓기, 내면의 명품화 등 다양한 동기가 있겠지만, 온갖 재앙과 재난을 국가도, 시장도 해결해 줄 수 없다, 결국 우리밖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기부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변화에 대한 대안이 우리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 기부고 봉사다. 데리다의 '환대'라는 개념을 빌리자면, 봉사활동을 통해 직접 만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만나서 그로 인해 나를 구원시키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다."
-착한 소비, 윤리적 기업 같은 담론들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블루오션처럼 부상하고 있다. 선진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자연스런 풍경일까, 대기업의 고도의 마케팅에 휘말린 일시적 유행일까.
김진화 "최근 급증한 개인기부는 시장 낙오자를 돕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 같은 거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기에 착한 소비는 아직 멀었다. 착한 소비는 궁극적으로 시장 한 복판, 자본주의의 핵심 메커니즘을 소비자의 힘으로 바꾸겠다는 것인데 쉽지 않은 일이다.
한쪽에서는 노동착취에 의해 만들어진 제품을 소비 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소외계층을 위해 기부하는 이중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소비자가 쉽게 착한 상품을 구별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시장을 혁신할 수 있는 비영리단체가 생겨야 한다. 착한 소비는 선한 의도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조한혜정 "지금의 기부 붐은 일시적 유행이라기보다는 흔히 선진적이라고 말하는 착한 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 긍정적 징후들이라고 본다. 하지만 긍정적이면서도 걱정스러운 것은 내가 돕는 인간이기 때문에 남보다 내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위험하다. '저 아이들은 배고픈데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니까 돕는다, 나는 훌륭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왜 저 아이들은 배고플까. 무엇이 이런 현상을 나타나게 만든 걸까'를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제국주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후진국에 구호품을 보내며 윤리적 허망감을 채운 서양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 기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만남'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
"사람답게 살겠다는 희망을 지닌 사람들이 냉혈한 자본주의 시스템과는 다른 형태로 만나고, 맺어지고, 일하는 게 기부다. 기부라는 장기적 신뢰관계를 통해 돈이 아닌 돌봄과 나눔의 순환체계를 구축할 수 있고, 그것이 세상을 더 크게 만드는 불씨가 될 것이다."
'기적'
▦박미경 굿네이버스 나눔팀장
"기부를 모를 때와 알고 난 뒤의 삶은 엄청나게 다르다. 받는 사람은 작은 것이라도 받음으로써 삶이 바뀌고, 주는 사람 역시 기부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삶이 달라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기부는 주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의 삶에 기적을 불러온다."
'백신'
▦김진화 오르그닷 대표
"우리는 치명적 위기사회에 살고 있다. 백신만으론 치료가 되지 않지만 몸 속에 항체를 만들어주듯, 기부 백신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시스템 변화를 모색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항체를 만들어준다. 그 항체로 경제ㆍ환경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매운맛 떡볶이'
▦정현수 개그맨
"매운맛 떡볶이는 먹을 때는 맵지만 먹고 나면 자꾸 또 먹고 싶어진다. 기부도 할 때는 내 지갑에서 돈이 나가니까 잠시 속이 쓰리지만, 하고 난 뒤 느끼는 보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자꾸 하게 된다. 매운맛 떡볶이처럼, 기부도 중독이다."
정리=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강희경 기자 kbst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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