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익대 부근에 위치한 공연장 '브이홀'. 평소라면 젊은 관객으로 붐볐을 이곳 무대에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섰다. 경기 의정부문화원 소속의 '한마음 실버밴드'다. 보컬, 기타 3대, 베이스 기타, 키보드, 드럼을 맡은 멤버들이 빨간 티셔츠를 맞춰 입고 자리를 잡자 무대가 꽉 들어찼다.
손영자(73ㆍ여)씨가 "오늘 내 나이는 열일곱에서 멈췄어요"라며 '나는 열일곱살이에요' '땡벌'을 연달아 불렀다. 2006년 창단 때부터 참여한 최고령 회원인 손씨는 이날 밴드 반장인 김정희(65ㆍ여)씨와 함께 보컬을 맡았다.
트위스트를 추면서 관객 호응을 이끌어내는 동작에서 원년 멤버의 관록이 묻어났다. 손씨는 "이거 빼면 삶의 의미가 뭐 있을까 싶게 노래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지난해 중국에서 사업하던 외아들을 심장마비로 떠나 보낸 슬픔을 달래주는 것도 음악이다.
서효석(71ㆍ여)씨는 박경자(68ㆍ여), 제성자(68ㆍ여)와 번갈아 드럼을 쳤다. 손발이 쉴새없는 격렬한 연주에도 할머니 드러머들은 끄떡없었다. 서씨는 "부엌데기였던 어린 시절 부뚜막을 두들기며 노래를 흥얼거릴 때부터 박자 맞추기엔 소질이 있었다"며 "생판 처음 배우는 드럼인데도 경력자를 제치고 첫 공연 연주를 내가 맡았다"고 자랑했다. 그녀의 남동생은 강남심포니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서현석씨다.
단원 17명 중 이번 공연엔 11명이 참가했다. 베이스 기타를 맡은 김갑선(67)씨는 "글이나 그림은 시간을 두고 계속 고칠 수 있지만 음악 합주는 흐름을 놓치면 망치는 만큼 늘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며 밴드 활동의 매력을 설명했다.
김정희씨는 "단원 모두 주 2회(월ㆍ금) 연습이 생활의 최우선이라 여간해선 결석이 없다"고 말했다. 기타를 치는 김도업(65)씨는 "한 달에 한 번 저녁을 함께 먹고 노래방에 가는 일도 쏠쏠한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한마음 실버밴드는 창단 때부터 악기를 다뤄본 적 없는 초심자만 회원으로 받는 순수 아마추어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석 달 전 입단해 이날 첫 공연을 치른 '막내' 방순남(62ㆍ여)씨는 "악보도 못 읽는 상태에서 콩나물(음표) 보랴, 건반 짚으랴, 그저 막막했는데 어느새 두 손 연주를 할 수 있는 곡도 생겼다"며 뿌듯해 했다.
창단 이후 줄곧 밴드를 지도해온 한정호(36)씨는 "다른 실버밴드는 연주 경력이 있는 분을 오디션을 통해 뽑거나, 젊은 연주자들과 어르신들을 함께 편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지난해 실버밴드 경연대회에선 비록 예선 탈락 했지만 오히려 다른 밴드들의 박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화려한 기교는 없고 가끔 잔실수도 있었지만 열정만큼은 뜨거운 무대였다. 남녀노소가 어우러진 관객 100여 명도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적극 호응했다. 한정호씨가 활동하는 록밴드 멤버들과 함께 영화 삽입곡으로 인기를 얻은 '이차선 다리'를 연주하는 순서도 있었다.
한씨는 "처음엔 록 음악을 하는 실버밴드를 구상했는데, 어르신들이 송골매, 산울림은 잘 모르고 신카나리아, 김추자를 좋아하시더라"며 "어르신들이 즐겁게 연주하는 것이 밴드의 존재 이유"이라고 말했다.
이날 공연은 지난해 11월과 올해 4월에 이어 세 번째로 열리는 '나이 없는 날' 행사 중 하나였다. 원래 서교동 지역 축제였던 행사가 이번엔 지방문화원에서 운영하는 '어르신 문화학교' 60여 곳, 2,000여명이 참가한 전국적 문화 축제로 치러졌다. 이날 하루 '젊음의 거리' 홍대 일대는 나이를 잊은 열정이 빚어낸 공연과 전시회로 여느 때보다 생기 넘쳤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