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현(충남 서산시 서령중 3)군은 이번 여름방학 내내 학원과 담을 쌓고 지냈다. 병현군도 원래는 초등학교 입학 이래'학원에 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올 1학기에도 방과후엔 당연히 학원 종합반으로 직행하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5월부턴 방과후에 학원 대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공부방 '아이비스쿨'로 향한다. 아이비스쿨은 아빠네 회사가 만들어준 공부방이다. 병현이는 "학원 선생님들한테 모르는 문제가 있어도 잘 물어보질 못했는데, 여기 선생님들은 하루 몇번씩 찾아갈 수 있어 더 좋다"며 "학원에 가지 않고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8일 밤9시 서산시 동문동 삼성토탈 사택단지 입구 상가건물 3층에 있는 '아이비스쿨'. 상담실 밖 복도에는 영어나 수학 문제집을 품안에 낀 학생들 서너명이 서성였다. 멘터 선생님과의 상담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5월15일 문을 연 아이비스쿨은 요즘 서산 일대 중고생들이 가장 다니고 싶어하는 독서실 겸 공부방이다.
아이비스쿨은 삼성토탈이 직원 자녀들을 위해 특별히 만든 공간이다. 생산공장이 있는 서산은 서울 등 대도시에 비하면 사교육 여건이 열악하지만 직원들 대다수는 사교육 열풍을 무시할 수 없는 까닭에 이중삼중으로 소외를 느껴오던 터였다. 자녀교육 문제 때문에 가족을 해외로 보낸 '기러기아빠'는 물론 자녀가 중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면 가족을 서울로 올려 보내고 홀아비 생활을 하는 '갈매기아빠'도 점점 늘었다. 공장에 근무하는 직원 863명 중 갈매기아빠만 102명에 달했다. 고등학생 자녀에게 월 평균 48만원을 학원비 등으로 지출하는 등 초ㆍ중ㆍ고생 자녀 1인당 사교육비로 쓰는 돈이 월 평균 40만원이나 됐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라도 해결 못한 사교육 문제 해결'에 회사가 총대를 메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올 1월 취임한 유석렬 사장이 노사협의회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직원들은 자녀 사교육 부담에 따른 고충을 털어놓았다. "월급은 안 오르는데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애들 교육 때문에 지방 근무 못하겠다"는 등 불만이 터져 나왔다. 유 사장은 "직원들 사교육비 부담이라도 줄여주자"고 했다.
사택단지 안에 비어있던 상가 건물 3층을 직원들 중ㆍ고생 자녀를 위한 교육센터로 탈바꿈시켰다. 독서실 공간을 만들고 입시전문 카운슬러를 특채해 상주시켰다. 학생들이 공부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생기거나 학교 생활 등에 고민이 있을 때 1대1 멘터링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선생님들도 특별히 모셨다.
젊은 동료 직원들 가운데 명문대 석ㆍ박사 출신 15명이 멘터가 되겠다고 나섰다. 사원 가족들이 어머니 운영위원을 맡아 직접 출결상황도 체크하고 영어기사 등 학습자료나 입시관련 기사 스크랩도 해두고 면학 분위기도 만들어준다.
아이비스쿨은 이제 서산 일대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독서실로 자리잡았다. 200석 규모의 독서실에다가 입시전문 카운슬러 및 멘터링 선생님과 상담할 수 있는 상담실, 인터넷강의실 등을 갖추고 있지만, 전부 무료다. 전체 좌석 가운데 10%는 소년소녀가장 등 소외계층 학생들에게 할애하고 나머지 좌석은 직원 자녀에게 우선 배정하는데, 대기자가 늘어나고 있다.
아이비스쿨이 생긴 뒤 서산 일대 독서실비가 월 2만원 가량 떨어졌다. 아파트 가격은 작년 회사에서 분양받을 때와 비교해 2배 수준으로 뛰었다. 아파트 단지 일대가 서산의 '8학군'으로 부상하고 있다.
직원들은 인근 학원에선 만날 수 없는 엘리트 선생님, 어머니같은 운영위원들을 믿고 자녀를 맡길 수 있어서 대만족이다. 병현군의 아버지 민휴식 삼성토탈 품질관리팀장은 "선생님들이 모두 동료이니 '아이 공부 좀 잘 봐달라'고 부탁하기도 편하다"며 "학원 1곳을 줄이고 독서실비를 아끼니 한달에 40만원 가량 월급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중학생인 두 아들을 아이비스쿨에 보내는 이현희 운영위원도 "특히 수학 과목은 학원에 보낼 필요가 없어졌다"며 "인근 입시학원들과 경쟁해도 떨어지지 않으니, 스스로 학원에 그만 가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삼성토탈은 앞으로 아이비스쿨에서 해마다 미 아이비리그 대학 입학생을 2명 이상 배출하겠다는목표도 세웠다. 특목고에 가지 않고도 아이비리그 유학에 성공할 수 있도록 문화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지원할 계획이다. 유성기 인사팀장은 "사교육 없이도 '강남 8학군'에 못지 않은 자녀교육 여건을 갖추도록 지원할 방침"이라며 "회사가 자녀 교육을 책임져 직원들의 애사심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지방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우수 인력 확보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산=문향란 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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