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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가을 숲에 어미는 야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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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가을 숲에 어미는 야윈다

입력
2009.09.09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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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행 철이다. 햇빛이 비치는 산길 나뭇잎에 불그레한 빛이 돌기 시작하면 숨어 있던 열매들이 오롯이 드러난다. 나뭇잎은 하루가 다르게 힘이 빠지는데, 열매는 하루가 다르게 가을빛에 영그러 간다. 여름 산행에서 만났던 붉은 열매들에 비해 가을 열매들은 한결같이 실하고 단단하다. 가을 열매는 겨울을 버틸 양분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열매를 퍼뜨려줄 짐승들에게 월동식량의 효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도토리가 그렇고, 개암이 그렇고, 밤이 그러하다. 가을 열매를 위해 어미 나무는 얼마나 야위었을까,

가을 초입의 산길에는 잘려진 참나무 가지들이 수북하다. 아직 초록의 잎이 선명한 가지들이다. 잘려진 자리는 마치 예리한 도구로 자른 듯 매끄럽다. 가지 끝에는 예외 없이 도토리가 뭉쳐져 있고, 도토리는 저마다 작은 구멍을 가지고 있다. 도토리거위벌레의 산란 흔적이다. 부화한 애벌레는 도토리 속살을 먹고 자란다. 애벌레는 겨울이 오기 전에 도토리를 뚫고 나와 월동장소인 숲 바닥으로 들어간다.

어미는 애벌레가 흙 속으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가지를 땅으로 잘라낸다. 더 나은 산란실을 구하기 위해 이 어린 짐승은 햇빛이 가장 많이 도달하는 나무 꼭대기 가지를 고른다. 몸 크기 1cm도 되지 않는 도토리거위벌레가 순전히 입으로 잘라낸 이 정교한 단면에는 어미의 간절한 바람이 녹아 있다. 나무는 여름철 뜨거운 노동으로 가장 좋은 가지에 열매를 만드느라 고생했고, 짐승은 다시 자신의 새끼를 위해 힘든 노동을 기꺼이 했다.

올 봄에 작은 토끼 한 마리가 집으로 입양되었다. 벌써 4개월이 지났으니 사람으로 치면 처녀다. 짝 지을 때가 된 토끼는 전에 없이 예민해져서 으르렁거리며 밥통을 뒤집어엎고 물건을 물어뜯고 온갖 패악을 부린다. 토끼의 본능 앞에 새끼를 품고 낳고 기르는 어미의 고통을 아는 사람의 고민은 깊어진다. 어미가 되게 할 것인가.

우리 사람 역시 당연히 자식을 낳아 길러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위에서 출산을 두고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자식은 혼수 필수품목'이라는 당치않은 말이 방송매체를 타고 우스갯소리로 다루어지고, 가진 것도 없고 준비되지 않은 부모는 갓 나은 자식을 돈에 팔아 넘긴다.

출산을 독려하기 위해 주민이 곧 세수인 지방자치단체들은 새로 태어나는 아이에게 상금을 주고, 주택 분양에서는 자녀가 필수조건이 된다. 여전히 출산과 육아는 여성의 몫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여성 개인은 어미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더욱 중요해졌고 자녀 양육의 어려움은 더욱 심해졌다. 여성 개인과 어미의 인생이 충돌하는 양상이다.

이 충돌에 대한 처방은 물론 사회학자들이 내려야 하겠지만, 가을 산행에서 만나는 자연의 어미들은 소박하지만 자연스런 어미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도토리와 애벌레를 통해 어미의 유전자는 전달되고 매년 그들의 역사는 되풀이 된다. 모두가 슈퍼 어미가 되고 슈퍼 자식이 될 필요는 없다. 소소한 우리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우리의 어릴 적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는 자식을 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 기쁨이 약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도토리든 애벌레든, 그것들 역시 가을이 끝나기 전에 월동을 준비하는 또 다른 모정에 희생될 것이다. 물론 도토리 속의 애벌레는 도토리가 갖추지 못한 풍부한 단백질을 덤으로 제공할 것이다.

차윤정 생태전문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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