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 아니면 비즈니스를 하자" 생각에 해외시장 개척 결심97년 첫 참가했던 파리 '쁘레타포르테'의 규모에 압도 당해1000장 넘는 오더 수주하며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 엿봐세계가 인정하는 브랜드로 도약하는 그날까지 도전의 연속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파리에서는 의상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우리 스텝들은 밤새며 준비해간 옷들을 펼쳐놓고 얼마나 긴장하고 있을까.
'파리 쁘레타포르테 전시회'. 불어로 '쁘레타포르테'란 말은 우리말로는 '기성복'이라고 할 수 있다. 패션 역사가 워낙 깊은 프랑스에서는 산업화가 시작되기 이전 손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한 드레스들은 별도로 '오뜨꾸뛰르'즉 '고급 맞춤복'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우리가 소위 명품이라 하는 브랜드들은 거의 이 '오뜨꾸뛰르'에서부터 시작해 산업화를 거쳐 '쁘레타포르테'로 확장된 경우다. 아직도 이 브랜드들은 옛날 전통방식으로 드레스를 만드는 라인을 유지하고 있는데,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우리 입장에서는 그저 부럽고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여성복 전시회인 '프레타포르테' 전시회를 비롯해 스포츠 캐주얼, 액세서리, 란제리, 남성복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의류 전시가 동시에 열려 이 거대한 공간들을 속속들이 메워나간다.
여기에 모인 브랜드 수만 따져도 수 천개에 달할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시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런 거대한 박람회에 나는 1997년부터 지금까지 벌써 십 년도 넘게 매년 빠짐없이 꼬박꼬박 참가해 오고 있다.
지난주 내 글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는 내 다짐의 이유를 알 수도 있겠다. 언젠가부터 나에겐 '이상봉 100만불 수출'이란 신문지면의 헤드라인 같은 목표를 세운 적이 있었다.
물론 백 만불이라는 것은 상징적인 숫자일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해외시장에 꼭 진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섬유강국인 대한민국의 의류 수출 규모와 비교한다면 수영장에 물 한 방울 떨어지는 정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고급 기성복으로 100만불의 실적을 올린다는 것은 나에겐 꿈과 같은 일이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디자이너가 만든 고급 기성복을 사갈 수 있는 숍들은 매우 한정돼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파리 박람회에 참가한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파리컬렉션까지 이어지게 됐다. 결국 이 파리 전시는 나에게 해외시장 진출이라는 꿈에 도전하는 길을 열어준 곳으로, 추억이 깃든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내가 100만불의 꿈을 품고 파리로 출발한 그 초창기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다.
원래 97년도에 나는 파리가 아닌 런던에서 패션쇼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IMF 직전이었던 당시 상황은 하루를 예측하기 힘들만큼 매일 충격적인 뉴스들이 신문지면을 오르내렸다. 디자이너인 나는 그때까지 신문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을 만큼 사회나 경제 뉴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는 날마다 뉴스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패션이 사회경제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돼있나 깨닫게 되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신문의 모든 기사들을 꼼꼼히 읽는 습관이 생겼다.
결국 런던 컬렉션을 포기하고 매일같이 독촉하는 런던 홍보 에이전시의 계약을 뒤로한 채 파리로 향했다. '그래, 쇼가 아니면 비즈니스를 해 돈을 벌자.'이렇게 결심하고 파리 '프레타포르테' 전시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전시 전날 파리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전시장으로 달려간 나는 그 규모에 놀라고 말았다. 수없이 많은 브랜드들의 간판이 부스마다 걸려 있고, 동대문 시장보다 많은 이 브랜드들 가운데 과연 '이상봉'이 바이어들 눈에 띌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거기에다 참가국이 표시되는 내 부스의 간판엔 북한의 인공기가 붙어 있어 깜짝 놀라 사무국에 변경을 요청하기위해 달렸다.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큰 규모에 전시에 아직 국내 디자이너가 참가한 적이 많지 않아 빚어진 실수였지만 이는 낯선 곳에서 나를 더욱 작게 만들어 버렸다.
다음날 드디어 전시가 시작되었다. 물밀듯이 몰려드는 바이어들. 그러던 중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한 바이어가 부스에 들어와 앉았다. 첫날 오전10시 중동에서 온 바이어. 그들은 기꺼이 내 첫 고객이 돼주었다. 사실 첫날 문을 열자마자 바잉(buying)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많은 곳들을 돌아보고 가격도 비교하며 마지막 무렵 바잉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난주에 '나는 행운이 많다'고 얘기했던 것처럼, 첫 날 이루어진 계약은 나를 흥분으로 반전시켜놓기에 충분했다. 이 일로 내 꿈에 대한 희망 또는 가능성의 1%가 열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 전시엔 당시 나 말고도 몇 명의 디자이너들이 함께 참가했다. 물론 국내에서는 소위 다들 잘 나가는 사람들이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곳에 모여 나처럼 한 장이라도 더 팔려고 바이어欲?씨름하고, 서로 격려하며 전시 기간인 4일 내내 함께했다.
인공기가 걸릴 만큼 해외전시에 대한 정보도, 지원도 없어 참가자들끼리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화물차를 한 대 불러 짐칸에 짐을 싣고 남은 자리에 서로 쪼그리고 올라타도 웃음이 그칠 줄 몰랐다.
당시 우리는 '비 내리는 오더장'이란 표현을 쓰며 깔깔댄 적이 있었는데, 개인 샵에서 물건을 주문하기 때문에 사이즈 별로 거의 한 장씩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숫자 1이 가득한 그 오더장을 보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여 누군가가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첫 전시회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거기서 한 파리 에이전트도 만나 내 옷을 파리 전역으로 다니며 팔 수 있는 기회도 얻었고, 전시비용을 내준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그리고 독일의 한 브랜드에서는 전시장에서 내 옷을 보고 홍콩 지사장을 서울로 보내 디자인 계약까지 하게 되었다.
그쪽에서는 외부 디자이너와 협업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비밀로 해달라는 당부도 했다. 서울에 돌아와 비 내리는 오더장을 합산하니 1,000장이 조금 넘는 만족할 만한 수량이었다.
그 뒤로 나는 파리 뿐만 아니라 독일과 뉴욕에서 열리는 전시에도 참가해 더 많은 해외경험을 쌓게 되었다. 매번 전시를 위해 출국할 때면 공항에서 많은 짐들 때문에 씨름하고, 오버차지를 줄이기 위해 트렁크에서 옷을 꺼내 입을 수 있을 만큼 껴 입고, 들 수 있을 만큼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장돌뱅이처럼 보이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울컥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 결과 나는 내가 목표했던 것들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가야 할 곳이 많고 넓혀야 될 곳도 많지만 지금처럼 꾸준히 계속하면 언젠가는 더 큰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해외 패션 전시회는 외국 바이어와 직접 만나 비즈니스를 배울 수 있는 생생한 곳이다.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어렵고 힘들더라도 해외 전시에 직접 나가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힘을 키우라고 내 경험을 통해 조언해주고 싶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