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반(反)의 '72시간'은 열악한 현실에서의 견뎌내기에 대한 연극이다. 폐광 석 달을 남겨둔 탄광에서 작업하다 천길 아래로 매몰된 두 광부가 온갖 짓거리를 하며 시간을 때우는 이야기다.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남자가 실존적 폐허에 남겨진 인간이 할 수 있는 유희와 끝없는 기다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비교된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모습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구조팀은 현재 지하 800미터 막장에 매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광부 2명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구조작업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폐광을 석 달 남겨둔 이 탄광은 침목 등 제반 시설의 교체가 미뤄져 왔으며…" 라디오는 자신들의 불행을 생중계할 뿐,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 그러잖아도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그들의 삶은 더욱 질곡을 헤맬 뿐이었다.
이 연극은 어느 날 갑작스런 사고로 아득한 지하로 매몰된 두 사람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기억과 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인 두 사람이 성과 관련된 원초적 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기억을 불러내는 장치는 직접적이다. 광부의 자식을 만들기 싫어 뱃속의 아기를 지웠다는 옛 애인의 말은 우리 시대의 한 면을 상징한다.
실제 레일이 깔린 무대에는 여러 장치들 덕에 사실성이 가득하다. 폭파음, 매캐한 폭파 연기를 비롯해 두 사람의 의식 속에 있던 유행가 등 시각, 청각, 후각이 동원된다. 어둠 속에서 더욱 예민해지는 감각의 경계를 넘는 공감각적 장치들은 갱내라는 암흑의 상황에서 상승 효과를 발한다.
쓰고 연출한 박장렬씨는 "광부 이야기라기보다 갇힌 상황에 대한 상징"이라고 이 작품을 말했다. 그는 "1998년 첫 대본에 없던 정선 탄광과 카지노 이야기를 2002년에 넣게 됐다"며 "답답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우정의 가치, 원죄 의식, 내면의 추악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작품은 그가 애정을 갖고 버전업해오고 있는 중이다.
괄괄한 성격의 동철을 맡은 박재운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그가 말끝마다 붙이는 욕설은 육체노동자들의 원시적 힘을 상징하면서도, 그들 속에 잠재해 있는 분노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카지노가 들어선 날은 두 사람이 땅속에 갇힌 지 72시간 만에 시체가 돼 밖으로 나온 날이었다. 27일까지 상명아트홀 2관.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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