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詩로 여는 아침] 그에게는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詩로 여는 아침] 그에게는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입력
2009.09.07 23:47
0 0

그에게는 참으로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그의 손목은 시간을 잡아당기는 무거운 구리 문고리

그의 손목에서는 숨가쁜 말굽 소리가 났다

그의 손목에서는 매일 노오란 해바라기꽃이 피었다 졌다

신생의 아이들이 바구니 속에서 울어 보채는 동안

화분의 제라늄이 비릿한 비염의 코를 베어내는 동안

그는 얼룩진 매트리스를 창문으로 끌어내 마구 두들겨패고 있다

여자보다 더 많은 수의 시계가 그의 손목 안팎으로 꽃피며 지나갔다

그는 참 많은 일을 겪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느닷없는 사랑의 복면도 만났다 여우와 신포도도 보았다 깨진 무릎으로 찾아가는 아주 낡고 오래된 모서리도 보았다

그가 흰사슴을 보았을 때 날카로운 꼬챙이가 그의 눈을 찌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는 허공에 대고 정신없이 팔을 휘둘렀다 손목에 주렁주렁 매달린 시계들을 잠재우지 않으려

한때 그에게 단단히 손목 잡혀 있던 시간들이 이제 그의 손목을 되잡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 당신은 일생 동안 몇 개의 손목시계를 지녔는가. 요즘이야 시계가 흔하디 흔하지만 내 어린 시절, 손목시계는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첫 손목시계를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그 후, 어디를 가더라도 손목시계를 차고 다녔다. 어디 나뿐일까.

그 손목시계를 차고 집에서 거리로, 직장으로 그리고 상가집과 돌잔치집과 결혼식을 우리는 돌아다녔다. 그러나 사랑의 순간과 결별의 순간을 가령, 밤 열시 삼십이분 사십오초 라는 식으로 우리는 고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어느 시간에 태어나서 또 어느 시간에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깨닫는다. 탄생의 순간에도 누군가는 우리를 위해 시계를 보았고 죽음으로 들어갈 때도 그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시계가 무서워진다. 정확하게 기계적으로 인간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쩔쩔매면서 삶의 모든 굽이를 넘어가는 우리. 자신의 시간을 절대로 해독하지 못하는 우리.

허수경·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