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와 선배들은 우리 대학에서 주최하는 1957년 11월2일의 경제정책 토론대회에 내가 발표자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입영준비 때문에 바로 내려가야 할 형편이었고 논문 준비할 시간도 며칠밖에 없어서 사양했으나 피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내가 발표자로 그리고 친구인 곽승영(미국 하워드대 교수)이 토론자로 나가기로 하였고, 나는 '한국 경제개발과 재정금융정책 방향' 이라는 제목의 발표원고를 썼다. 이 토론대회에는 모두 9개 대학이 참여 하였는데 고대 발표자로 농림부 장관을 역임한 이희일씨가 기억에 있다.
행사 첫날 나는 마지막 순서로 발표를 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곧 바로 귀향 인사를 위해 권오익 학장실에 들렀던 바, 고승제 유진순 이해동 등 많은 교수들이 나의 발표에 대해 극찬해 주시고 이 행사를 주도한 선배들도 같은 말을 하면서 환송해 주었다. 그 날 나의 일기장에는 '발표를 마치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밤기차 속에서 뿌듯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느꼈다'고 쓰여 있다.
나는 고향에 내려가 집안일을 정리하고 일에 찌든 어머니와 중풍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어린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행 기차를 탔다. 군 복무 중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을지, 농사일은 어떻게 해나갈 수 있을지, 차 속에서는 이런 저런 생각을 했다.
서울에 온 다음날인 1957년 11월7일, 나는 밤기차로 논산역에 도착하여 논산 제2훈련소에 입소했다. 밤늦게 훈련소 내무반에 이르렀는데 하사관들이 방망이를 내리치면서 마치 소를 몰듯 큰 소리로 몰아세웠다. 아,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되는구나! 이렇게 나의 군 생활은 시작되었다.
매일 같이 계속되는 훈련은 생각할 틈조차 주지 않았으며 창조와 성취를 위해 고뇌하던 생활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수동적인 생활로 바뀌었다. 일기장을 빼앗긴 뒤로는 깨알 같은 수첩일기로 바꿨다.
훈련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면회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면회가 허용되었는데 면회에 불려나가면 가족들을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역병으로 불려나갈 걱정도 없었다. 그래서 나이롱 면회라는 것이 많았는데 면회 나간 사람이 부모에게 부탁해 친구를 면회 온 것처럼 불러내는 것이다. 대개는 음식도 나누어 먹는다.
나는 집에서 면회 올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면회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지도 않았다. 그 대신 몇 번 나이롱 면회에 불려가서 얻어먹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얼마 있다가 어머니가 오시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에 먹을 것을 잔뜩 이고 나를 불러내 먹이고 그 다음날 다시 불러내 또 먹이곤 했다. 나는 왜 오셨느냐고 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나는 신세를 진 친구들을 나이롱 면회로 불러내 빚을 갚기도 했다. 내가 훈련 받는 석 달 동안 어머님은 이렇게 몇 번을 더 오셨다.
1958년 2월초, 강추위 속에서 나는 서울 근교 창동에 있는 101 보충대를 거쳐 철원에 있는 15사단으로 갔으며, 여기서 다시 38연대 2대대 5중대 3소대로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철원 황학산 바로 밑에 있었으며 큰 저수지인 오지리보에서 황학산 쪽으로 2㎞ 지점이었다. 그 때 학도병은 단축복무이기 때문에 말단 소대에 배속하도록 했었다. 여기 와보니 훈련소는 그래도 환경이 나은 편이었다.
우선 사병들이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그 때 듣던 바로는 부대 장교들이 생활이 안 돼 보급물자를 빼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갑과 방한화가 지급되었지만 영하 12도 안팎의 추위로 동상에 걸리는 사람이 많았다.
아침밥을 먹고 야외훈련을 하고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면 낫과 새끼를 들고 황학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짊어지고 오는 것이다. 그래야 취사장에서 밥도 짓고 내무반 잠자리에도 불을 지필 수 있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우리 같은 이등병, 일등병 들은 밤새도록 번갈아 불침번을 서야 한다.
불침번을 서다가 잠이 들면 선임하사는 졸병들을 전원 집합시켜 엎드리게 하고 방망이로 후려치며 벌을 주었다. 그럴 때면 졸병들은 서로 네 탓이라고 투덜대곤 했다. 나는 지옥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하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일요일에는 훈련이 없었지만 으레 사역병 집합에 불려나가 일을 해야 했다. 그곳은 눈이 많이 와서 우리는 눈이 오는 대로 쓸어서 길 양쪽 옆에 쌓아 놓는다.
그런데 낮에 해가 뜨면 길의 눈이 녹아 양쪽에 쌓아 놓은 눈과 녹은 땅이 만나는 선이 들쭉날쭉 해진다. 그런데 한 번은 사역병으로 20여명의 사병이 불려나갔는데 우리에게 시키는 일이 땅과 눈의 들쭉날쭉한 선을 새끼를 치고 반듯하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우리를 지휘했던 하사관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조금 있으면 눈이 또 녹을 텐데 휴식을 취해야 할 사병들에게 이렇게 비생산적인 일을 시키는 것이 부당하지 않으냐 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이 하사관은 "이 새끼 아직 군인 정신이 안 들었다"고 하면서 나를 나오라고 하여 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엎드리도록 하고 구타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이 틀려 서였는지 명령불복종 이어서였는지 아니면 두 가지 다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일반 사회와 군 사회의 다른 점 일까? 나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울 때 새겨둔 글귀를 되새기면서 그 지휘관의 말에 순응하기로 했다.
"틀이 큰 사람은 능히 남에게 굴복할 줄 알고(大人能屈於人), 틀이 작은 사람은 남에 대해 스스로 강한 체 하는 것이다(小人自强於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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