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ㆍ30 일본 총선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찌감치 민주당의 압승과 자민당의 참패가 예상되긴 했지만, 전면적 판 뒤집기를 현실로 확인하는 느낌은 여전히 새로웠다. 중의원 480석 가운데 민주당과 자민당이 각각 308석과 109석을 얻은 선거 결과는 113대 296이라는 4년 전 총선 결과를 그대로 뒤집은 듯하다.
다양한 요인이 지적됐다. 자민당 장기 집권에 대한 염증,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이후 아베 신조ㆍ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아소 다로 총리를 거치며 분명하게 드러난 자민당의 지도력 부재,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한계와 그에 따른 서민생활 압박 등이다.
그러나 4년 사이에 유권자들의 태도가 돌변한 이유가 명료하지는 않다. 정치적 태도를 바꾼 유권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동기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투표에 임했는지가 밝혀져야만 풀릴 수 있는 의문이다.
4년 만에 돌변한 일본유권자
그런데 시간을 늘려 잡으면, 변화의 큰 흐름은 보인다. 자민당 장기지배 체제의 피로 증세와 다름 아니다. 1955년 이래 지속된 자민당의 지배는 1993년 비자민 연립정권의 수립으로 휘청거렸다. 그때까지 38년 동안이나 일본 유권자들이 자민당을 지지한 것은 패전의 잿더미에서 경제대국을 일으켜 세운 국가운영 실적에 대한 평가와 다름없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수반하는 정치적 민주주의 욕구나 그 상징인 정권교체 욕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현대 일본사회와 어울리지 않는 과거의 이념노선에 치중한 일본사회당(현 사민당)의 건재가 역설적으로 그런 욕구를 제약했다. 제1 야당이 견제세력이 될 수는 있어도 대안정당은 아니라는 현실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정책과 노선이 다른 자민당 내 파벌이 돌아가며 정권을 맡는 '유사 정권교체'가 유권자들의 정치적 좌절을 위로했다.
자민당 파벌정치의 양대 기둥이 정경유착에 따른 돈줄과 각 파벌의 공천권 행사가 가능한 중선거구제였다. 93년 총선은 불법 정치헌금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자민당의 부패를 가릴 수 없게 되고, 돈줄이 크게 움츠러든 가운데 치러졌다. 더욱이 91년부터 소선거구제 논의가 본격화, 중선거구제 유지 전망도 흐렸다. 이처럼 파벌정치의 기반이 흔들린 데다 신생당과 신당사키가케 등 대안정당이 결성된 새로운 환경의 선거에서 자민당은 정권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 뒤 자민당이 정권을 되찾은 후 파벌정치가 겉으로는 되살아났으나 94년 소선거구제가 도입되고, 정경유착과 정계비리를 끊기 위한 정치개혁이 잇따른 결과 실질적 기반은 무너졌다. 그 상징이 특유의 대중동원 전술로 일반당원의 폭 넓은 지지를 몰아 당내 세력분포 열세를 극복한 고이즈미 전 총리의 등장이었다. 그는 '우정(郵政) 민영화'를 내세워 4년 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자민당의 부활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고이즈미 돌풍'은 변화 흐름 속의 소용돌이에 지나지 않았다. 야당의 거듭된 이합집산으로 지지 유입이 주춤했던 데다 야당보다 더욱 야당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던 고이즈미 전 총리의 언행이 끌어낸 유권자의 착시 현상이었다. 이는 통합 야당인 민주당이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이래 보궐선거와 주요 지방선거에서 연승한 데서 쉽사리 확인된다. 이런 흐름으로 보아 이번 일본 총선 결과는 '민주당 압승'보다 '자민당 참패'로 기록하는 게 낫다.
특이상황은 오래 갈 수 없어
4년 만의 판 뒤집기는 한국정치가 먼저 경험했다. 17대 총선에서 152대 121로 한나라당을 누른 민주당(당시 열린우리당)은 지난해 18대 총선에서는 81대 153으로 참패했다. 17대 총선 결과가 '탄핵 역풍'이라는 특이상황에 의한 것일 뿐 한국사회의 보수화 흐름이 크게 물길을 튼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만에 하나 한일 양국이 나란히 겪은 '4년 전'이 특이상황이 아니라면? 방향을 잃고 뜻 없이 몰려다니는 유권자들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것만은 정말 상상하기도 싫다.
황영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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