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연기 자욱한 지하 당구장, 쓰리쿠션을 날리고 환호성을 지르는 교복 차림의 고교생 손님들, 이들이 먹다 남긴 자장면 그릇…. 5일 서울 논현역 옆 제우스당구클럽에서 이런 장면이 실제로 벌어졌다.
서울 보성고를 1971년 졸업한 61회 60여명. 기업 최고경영자(CEO)로, 대학병원장으로, 공직자로 사회에 자리잡은 중년의 친구들이 40년전 부모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했던 일들을 재현하는 '추억으로의 당구 여행' 행사를 가졌다.
"고교 시절 교복을 입고 그때로 돌아가 보자고 제안했는데,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참석한 것에 저도 놀랐습니다."(김동빈ㆍ57ㆍ61회 총무ㆍ'우리나라 미단식품' 부사장)
김씨는 "교복은 의복 대여점에 갔더니 서울 양정고 교복이 있어 단체로 빌렸는데, 교모는 마땅치 않아 이번에 아예 새로 구입했다"고 귀띔했다. 보성고와 양정고는 중앙ㆍ휘문ㆍ배제고와 더불어 당시 5대 사학으로 불렸다.
당구 큐대를 잡은 박문일(57ㆍ한양대 의생명과학 연구원장) 교수는 "보성은 당시 고교로는 유일하게 교복에 명찰을 부착하는 것이 학생의 사생활과 인격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했다"며 "고교 시절 만끽 했던 자율, 자유의 정신이 인생에서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보성은 두발 규제도 없었다"며 "덕분에 50여년의 인생을 지내면서 단 한번도 머리를 짧게 밀어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수중분만에 성공한 산부인과 학계의 권위자로, 군복무를 군의관으로 마쳤다.
추억의 당구 이벤트가 기대 이상의 성황을 이룬 것과 관련, 61회 반장(회장)을 맡고 있는 코스닥 등록 기업 에프에스티(FST)의 장명식(57) 대표이사는 50대 후반이 겪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희 연배는 대부분 수 십 년간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고 새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있습니다. 여기서 비롯되는 충격과 불안이 만만치 않아요. 이럴 때 친구들을 만나면 큰 힘이 되고 실제적인 정보도 얻을 수 있지요."
그는 자신이 창업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친구들에게 조건 없이 제공하고 있다. 장 대표는 외국계 정보기술(IT) 기업의 임원으로 지내다 1987년 반도체 장비 생산업체인 이 회사를 창업해 13년 만에 코스닥 등록에 성공했다.
한국의 중년 남자에게 고교동창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걸까.
"인생의 신비를 막 발견한, 순수한 백지 상태에서 만난 친구들입니다. 평생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지요"(박문일)
"사회생활을 한참 바쁘게 하던 시절에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드니까 그리워지는 게 고교동창이네요.2006년에 개교 1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가진 것도 모임 활성화의 계기가 됐습니다."(김동빈)
오후 3시에 시작한 당구는 3시간 동안 이어졌다. 오후 6시, 이들 60여명의 '고교생'은 당구장을 나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음식점으로 단체 이동했다. 교복을 입은 노신사 60여명이 교모 바깥으로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내비치며 서울 도심을 거니는 행렬은 이날의 마지막 이벤트가 됐다.
이승범 두산타워 대표이사, 서문규 전 한국석유공사 부사장, 사진작가 김석종씨 등이 참석했다.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도 61회 졸업생이다. 보성고는 61회가 다니던 시절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다가 지금은 방이동에 있다.
이민주 기자 mjlee@hk.co.kr
사진-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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