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나는 조영래를 자주 언급한 바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이쯤에서 조영래가 어떤 사람인지를 밝혀두고자 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절대로(!) 남에게 말한 일이 없는 데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어 그에 대한 나의 설명은 주관적 판단일 뿐 조영래의 진면목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영래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경기중고등학교를 거쳐 1965년도에 서울법대에 입학했는데, 역대 서울대학교 입학시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
그러나 그는 학급에서건 학교에서건 1등 한 일이 거의 없는데, 그렇게 하려고 애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일등주의자'가 아니었으며 학과공부보다는 세상공부에 몰두했다. 서울대 수석입학 인터뷰에서 '붙으면 됐지 톱은 무슨 톱입니까'라고 말했는데, 그의 성품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주도한 이래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고, 이 때문에 1년6개월간 징역을 살고 6년 넘게 수배생활을 했다. 사법시험 공부를 하면서도 학생운동 관련 글을 쓰고, 심지어 보름 넘게 '전태일 투쟁'에 전념했을 정도니, 그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의지가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학생운동과 재야민주화운동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하는 수많은 선언문과 성명서를 썼고, 이 문건들은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어 우리나라 인권변론의 새 장을 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거니와, 특히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에서의 변론서는 전두환 정권을 끝장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글을 잘 썼는데, 그의 글은 하나하나가 역사에 남을 명문이다. 민주화운동 관련 글들도 명문이지만 신문칼럼이나 변론서는 그 방면의 전범이 될 만큼 뛰어나다.
그가 쓴 <전태일평전> 은 인간해방운동의 고전이 됐으며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변론서는 피고인에 대한 변론을 넘어 법조인은 물론 국민 누구나 읽어 마땅한 '권리장전'이었다. 전태일평전>
그러나 그는 43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폐암으로 죽었는데, 평소 감기도 잘 안 걸리던 그였다. 그가 죽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때 이른 죽음을 슬퍼한 것은 물론, 무엇보다 그가 언젠가는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잘 이끌 것을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을 너무 안타까워했다. 요컨대 조영래는 참으로 탁월한 인물이었다. 재능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하며 업적이 지대했다.
그러면 어째서 그는 이처럼 탁월할 수 있었을까? 그의 재능과 인품과 업적으로 보아 도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일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그가 도인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거기서 크나큰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다음 두 가지 요인 때문에 도인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그가 겪거나 지켜본 가난과 갈등과 불의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와의 인연이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으며 특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산을 탕진한 때가 많아 엄청난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세상을 바꾸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으며, 그리고 그가 산 시대의 가난과 갈등과 불의를 보면서 세상을 바꾸려는 그의 의지를 더욱 굳혀갔다. 그와 내가 만나자마자 가까워진 것도 세상을 바꾸자는 데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런 결심과 의지는 당연히 가족과 이웃,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사랑과 의지는 그로 하여금 세상을 통찰할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세상을 바꾸려는 강렬한 의지에 기초한 그의 통찰력을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은 불교였던 것 같다. 그는 절 동네에 산 인연으로 중학교 2학년 때 스님을 만나 불교에 관한 설명을 듣고 반야심경을 접하게 되는데, 길을 가나 자리에 누우나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떠올렸으며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불경을 멀리한 일이 없다고 술회했다.
그 총명한 사람이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스스로 불교의 핵심교리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화두로 인생과 세상의 근본이치를 참구했으니 어찌 도를 통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조영래는 자기가 한 일을 자랑 삼아 말하는 법이 결코 없었다. 인간의 욕망 가운데 가장 제어하기 힘든 것이 명예욕이고 성현도 명예욕의 자제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도 조영래는 명예욕을 완벽하게 제어했으니 어찌 도인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것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의 온전한 구현이고, 기독교의 중요 계명인 '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의 온전한 실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영래의 삶은 도인의 삶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영래의 도인다움은 그의 죽음에서 완성된다. 조영래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했지만 그의 죽음은 그의 도인다움을 완성하는 길이었다. 그는 '중생이 앓으니 나도 앓는다'는 유마거사의 말을 무척 강조했는데, 그는 이 말을 살아서도 실천하고 죽어서도 실천했다.
결국 그가 병을 얻어 죽은 것은 중생이 앓고 있었기 때문이니, 그의 죽음은 도인의 죽음이었음이 분명하다. 중생이 앓고 있는데도 앓지 않는 성자를 성자라고 말해도 될까? 나라가 엉망인데도 위대한 정치지도자였다고 말해도 될까?
조영래의 죽음을 두고, 독재정권의 탄압 때문에 죽었다거나, 그가 앓은 암을 '시대암'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탄압한다고 죽을 그도 아니거니와 시대의 압력에 눌려 암에 걸릴 그도 아니었다. 그는 세상이 앓으니 앓았을 뿐이고, 세상을 계도하기 위해 죽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고 나도 그 가운데 하나지만, 대통령이 되는 데서보다 그의 도인다운 삶과 도인다운 죽음에서 더 큰 교훈을 얻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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