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시집/파블로 피카소 지음·서승석·허지은 옮김/문학세계사 발행·192쪽·8,500원
히든 페이스/살바도르 달리 지음·서민아 옮김/문학수첩 발행·552쪽·1만3,800원
'시인' 파블로 피카소(1881~ 1973), 그리고 '소설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
각각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라는 20세기 미술사의 거대한 물결을 온몸으로 떠밀고 간 현대 미술의 두 대가의 이름을 수식하는 관사가 어쩐지 어색하다. 익숙한 친구인 붓과 캔버스 대신 펜과 원고지를 손에 쥔 채, 시로 소설로 장르 월경(越境)을 단행한 이들의 행위는 어떤 의도였을까? 그것은 두 대가가 평생동안 씨름했던 '예술이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짓 아니었을까.
10만여 점의 판화와 조각, 3만4,0000여점의 스케치 등 피카소가 남긴 어마어마한 미술작품들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시인' 피카소가 남긴 시도 350편을 넘는다.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때는 1935년. 첫 아내 올가와 이혼했을 무렵이다. 이미 50대 중반에 이른 거장이 복잡한 심사를 달래려 마음 붙인 곳은 회화도, 조각도, 판화도 아닌 시였다. 피카소는 마치 접신(接神)이라도 한 것처럼 1935~36년 2년 동안 거의 매일 시를 썼다. <피카소 시집> 에 수록된 100여 편의 시중 절반 가량이 이즈음 쓰여진 것들이다. 피카소>
시적 완성도는 차치하고라도, 비정형적인 형식과 결합된 격렬하고 관능적인 시어들은 그의 그림처럼 독자를 압도한다.'칼날은 오늘 오후의 애수의 상처를 불태우고 뜨개질하는 여인은 물방울을 갈기갈기 찢는다'('1935년 12월15일'에서) '그의 발톱들의 애무하는 듯한 분출이 술잔 바닥에 자기 욕망의 번득이는 칼날을 미끄러뜨리고 싹트는 음악 곡조의 씨앗을 깨문다'('1936년 2월10-12일'에서).
"단어로 그림을 쓸 수 있고 시에 느낌을 그려 낼 수도 있으니 어쨌거나 모든 예술은 하나다"라는 피카소의 예술론은 이렇게 육체성을 얻는다.
달리의 유일한 소설인 <히든 스페이스> (1944)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룬 유럽을 무대로, 사랑을 갈구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두 남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꿈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의 그림과 이 소설의 이미지들은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꽃을 꺾어 춤을 추면서 머릿속의 찰나적 단상들을 표현하거나, 아편에 취해 몽환의 세계를 헤매는 여자주인공들에 대한 묘사는 색 대신 언어를 질료로 인간의식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던 달리의 예술적 고투의 변용된 형태다. 히든>
이 소설을 영어로 번역한 작가 호콘 슈발리에의 설명처럼 달리의 소설을 관통하는 메시지는'죽음을 무릅쓴 사랑'이다. 피카소에게 2명의 부인과 5명의 애인이 있었다면, 달리의 예술혼의 밑바탕에는 한 여인에 대한 평생에 걸친 사랑이 있었다. 그는 이 소설의 앞 부분에'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며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 아름다운 나의 요정 갈라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고 썼다.
갈라는 스물다섯살의 달리가 사랑에 빠져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던 아홉살 연상의 여인,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엘레나였다. 피카소에게나 달리에게나 미술과 문학과 사랑은 이렇게 한몸으로 불탔던 것이다.
이왕구 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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