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람과 비가 없었던 탓에 평년 이상의 수확이 기대되는 올해. 하지만 이젠 '풍년'이 마냥 기쁠 수만은 없다. 지난해 거둔 쌀이 아직도 창고 곳곳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많이 거둬들이는 만큼 재고도 늘어나는 현실. 이젠 근원적 해법을 찾아야 할 때다. 한국일보는 5회 심층기획 시리즈를 통해 쌀 수급불균형의 실태를 점검하고 농민과 소비자, 정부가 모두 윈-윈 할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지난해(양곡연도 기준 2009년) 국내서 생산된 쌀은 총 484만3,000톤. 2004년 이후 최대 생산량이었다. 좋은 날씨가 안겨준 대풍(大豊)의 결과였다.
굳이 보릿고개 시절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풍년은 모든 농민들의 소망.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오히려 풍작의 기쁨도 잠시, 농민들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진다. "농사가 잘 되면 뭐 하나요. 팔리지 않고 재고만 쌓여가는데…."
지난해의 경우, 전년에 소비하지 못한 쌀 69만톤과 수입 쌀시장 개방 연기에 따른 의무수입량 25만7,000톤이 더해져 시장에는 총 579만톤의 쌀이 공급됐다. 그러나 수요는 497만5,000톤에 그쳐 결국 81만6,000톤의 쌀이 남아 돌게 됐다.
공급이 늘면 가격이 떨어지는 게 경제법칙. 8월 초 쌀값은 지난해 수확기 대비 6% 가량 주저 앉았고, 결국 정부가 수급안정을 위해 10만톤의 잉여 쌀을 매입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괴롭고, 쌀값 지지를 위해 재정을 투입해야 하는 정부는 정부대로 괴롭고, 그렇다고 소비자들이 혜택을 입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정부의 쌀 매입 조치는 말 그대로 임시 방편일 뿐, 근원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수급불균형을 깨기 위해선 결국 공급을 줄이거나 수요를 늘려야 하는데, 쌀의 특성상 '공급'쪽은 섣불리 손대기가 쉽지 않다. 쌀 재배면적 자체를 줄여 생산축소를 유도할 경우 가격은 오를지 모른다. 하지만 식량안보의 핵심수단이자 한국민의 오랜 정서가 담긴 쌀을 이런 식으로 줄여나갈 수는 없는 일. 더구나 물을 가둬 키우는 벼논의 특성상 한번 줄어든 면적은 복원이 안 된다고 한다.
결국 남는 답은 수요 쪽. 즉, 소비확대를 모색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재고를 줄여라
늘어나는 쌀 재고를 줄이기 위해 정부는 물론, 각 지방자치단체에도 비상이 걸렸다. 특히 햅쌀 수확이 임박하자 각 지자체들은 값이 더 떨어질 것을 우려, 쌀 재고량 줄이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아침밥 먹기'같은 고전적 캠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쌀 소비촉진을 위한 별의별 아이디어를 다 짜내고 있는 실정이다.
충남 천안 소재 중학교들의 경우 이번 달부터 하루 급식을 두 끼로 늘리기로 했다. 고등학교만 하루 두 끼(점심, 저녁)의 급식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쌀 소비 촉진을 위해 충남도가 중학교 급식도 하루 두 끼로 늘릴 수 있도록 정부에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졌기 때문.
또 지난해 벼 매입량의 50% 수준인 1,140톤을 재고로 안고 있는 완도군은 '고향쌀 특별판매 캠페인'을 열고 완도군연합 농협미곡처리장(RPC)이 생산하는 쌀 〈햇살로 가는 여정〉을 주문하면 택배비 3,500원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강원도는 지난해 쌀 소비 촉진을 위한 전용 홈페이지(www.gwssal.com)를 구축하고 전국 각지로부터 주문을 받고 있다.
소비를 늘려라
쌀이 남아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일상생활의 변화. 육류와 곡물 가공식품 등으로 식생활의 폭이 넓어지면서 쌀 소비가 감소하고 있는데다, 1인 가구와 맞벌이 부부의 증가 등으로 빵, 라면, 시리얼 등 대체식품 소비 증가도 쌀 소비 감소를 부추기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75.8㎏. 전년(76.9kg) 대비 1.1㎏(1.4%), 10년 전에 비하면 무려 23.4㎏나 줄었다. 김연규 국립식량과학원 답작과장은 "우리와 같은 종류(자포니카)의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도 해마다 쌀 소비량이 꾸준히 줄어 2007년 현재 61.4kg을 소비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이 추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쌀을 신성시해온 나머지 쌀을 밥 이외의 용도로 가공하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점 ▦2002년 이후 연간 40만~50만톤 수준으로 지원되던 대북 쌀 지원이 지난해부터 중단된 점 등도 쌀 수급불균형을 초래한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정부는 쌀 소비를 늘릴 수 있는 가장 현실적 방안으로 '쌀 가공식품 활성화'를 꼽고 있다. 특히 과자나 빵, 국수 등을 밀가루 대신 쌀가루로 만들도록 하자는 것이다. 민승규 농림수산식품부 제1차관은 "가공용 쌀의 공급가격을 30% 인하해 밀가루와의 가격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하고 연구개발 지원, 시설 현대화 등을 통해 쌀 가공산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밀가루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의 10%만 쌀이 가져와도 쌀 재고 문제는 수그러들고, 식량 안보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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