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자와 나쓰키 지음·노재명 옮김/산책자 발행·476쪽·2만원
이 책의 화자는 '그'다. 읽어보면 분명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저자 이케자와 나쓰키의 목소리다. 그런데도 고집스레 '나'가 아니라 '그'를 글머리에 내세운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이 여행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선 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알 듯 말 듯한 핑계를 댄다.
짐작해 보건대, 스스로 아마추어라 하지만 전문가 못지않은, 때론 전문가를 능가하는 식견을 드러내는 계면쩍음 때문 아닐까. 저자는 13개국을 여행하며 그리스의 조각상부터 경주 남산의 돌부처까지 두루 만난다. 그리고 세월에 닳고 녹슨 돌과 쇳덩이에 웅숭깊은 사유를 불어넣어 독자들 앞에 생명을 가진 존재로 세워놓는다.
책의 일본어 제목은 '파레오 마니아'. '파레오'는 '고대의' '오래된'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저자는 현장의 문화인류학자 역할까지 떠맡았던 19세기 선교사들에 자신을 빗댄다. "'그'의 자세는 어딘가 이 선교사들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세계를 순회하는 바쁜 선교사. 가는 곳에서 복음은 전하지 않고 그저 보고 듣는 것에 바쁜 신학의 낙제생."
여행은 그리스와 이집트, 인도, 이란, 캐나다 등등의 순으로 이어지지만, 출발점은 언제나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다. 세계 각국에서 약탈당해 이곳에 전시된 문명의 조각들은 저자의 발길을 그 문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현장으로 이끌었다. 호사스러운 인텔리의 취미임이 분명하지만, 이 인텔리는 개인적 감상을 넘어 고대의 흔적 위에서 진중한 문명론을 펼친다.
예컨대 그는 수메르 점토판에 새겨진 설형문자에 감탄하다가, 이내 문자 없이 살았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애버리진의 바위그림 앞에서 까닭 모를 그리움을 느낀다. "애버리진은 문명을 쌓아 올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정신적으로 창조해낸 풍요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바위에 그려진 여자들은 행복하게 보인다.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면 문명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위해 우리는 돌을 쌓아올린 걸까?"
차갑고 깊게 스며드는 저자의 눈빛은 한국의 경주 남산을 답사한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왕가의 후원을 받을 경우 사찰은 크고 장엄하며, 불상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남산의 불상은 국가 시스템과 관계 없다… 이처럼 자비롭고 따뜻한 시선으로 보통 사람들을 바라보는 불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그'를 감동시켰다. 돌솥비빔밥을 힘있게 비벼가면서 다시 생각에 빠진다."
유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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