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헬싱키에서 노르웨이 오슬로로 출발한 비행기 안. 잠깐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비행기는 벌써 하강을 준비했다.
말로만 듣던 노르웨이 숲이 발아래다. 여름이 지났음에도 신록처럼 부드러운 초록. 누군가 '노르웨이안 그린'이라 했다는 노르웨이 숲의 고운 빛이 마음을 달뜨게 했다. 숲 사이로 휘휘 저어 흐르는 강물과 색색의 지붕을 인 목조 주택들로 풍경은 더욱 풍요로웠다.
이 매혹적인 풍경 저편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피오르드(Fjord)가 있다. 빙하가 제 몸을 부숴 가며 만들어 낸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피오르드. 어감이 좋다. 나지막이 피오르드라고 불러 본다. 입 안에서 구르는 음절에서 푸르름, 부드러움, 상쾌함이 한번에 퍼져 오른다. 피오르드의 장관을 보지 못했다 해도, 그 생성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해도 이미 피오르드란 단어는 그 어감만으로 충분히 사람을 매료시킨다.
노르웨이는 피오르드의 나라다. 빙하의 침식으로 생긴 좁고 깊은 협곡의 바다 지형인 피오르드가 노르웨이 해안 전체를 수놓고 있다.
아름다운 노르웨이 피오르드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를 먼저 찾았다. 유네스코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한 절경의 피오르드다.
올레순에서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입구인 헬레쉴트까지 긴 버스 여정이 끝나고 드디어 페리에 올라 피오르드 물줄기 속으로 들어섰다. 헬레쉴트에서 물길의 끝인 게이랑에르까지 S자로 휘어진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배의 육중한 엔진 떨림에 가슴도 함께 두근거렸다. 길고 깊은 초록의 장엄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산 속에 갇힌 듯하고 파도도 일지 않는 물이지만 이 물은 민물이 아닌 짜디 짠 바닷물이다.
산과 산 사이에 산호가 살고, 고래가 춤추는 바다가 끼어든 것이다. 땅의 한복판까지 깊숙이 침입한 바다. 땅의 속살과 깊은 바다가 어우러진 진한 만남은 화려했다. 산자락의 푸름이 그대로 미끄러져 바닷물로 곤두박질했다.
갑판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는데 문득 서늘한 바람이 불어 왔다. 초록의 바람이고 빙하의 바람이다. 녹아 내린 빙하의 분노가 얼마나 컸길래 산을 저렇게 뾰족하게 파헤쳤을까. 얼마나 강하게 긁어 내렸으면 저 가파르고 험준한 벼랑과 골이 생겨난 걸까.
좌우의 깎아지른 벼랑에선 아름다운 폭포들이 떨어진다. 하나 둘 세다가 너무 많은 숫자에 셈을 포기했다. 땅이 급하게 깎여 있으니 물이 한데 모여 강물을 만들기도 전에 바다로 떨어지는 것이리라. 빙하가 녹고 지난 겨울의 눈들이 녹은 물이 바로 폭포가 돼 속절없이 바다로 낙하한다. 일곱 자매, 신부의 베일 등 화려한 이름의 폭포들은 그만큼 화려한 기암과 어우러져 찬란히 부서져 내렸다.
게이랑에르 부두에 도착하니 그 좁은 협곡에 거대한 유람선 2척이 정박해 있다. 유람선 뒤편으로 그림 같은 마을이 살포시 들어앉았다. 배에서 내려선 꼬부랑길을 타고 전망대에 올랐다. 1869년 처음 사람의 발길이 닿은 이후 매년 수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 지정을 받게 한 절경의 뷰포인트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앞 아찔한 벼랑 너머로 평온한 마을과 둥글게 들어온 피오르드, 지난 겨울 내린 눈자락을 아직도 이고 있는 산봉우리들이 함께 펼쳐진다. 안전 시설 하나 없는 깎아지른 벼랑 위에 섰지만 아찔함보다 벅참이 먼저다. 이대로 떨어져도 좋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감동이 북받쳐 오른다.
피오르드는 대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그 자체가 응축된 대자연이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과 호수처럼 명징한 바다, 깎아지른 벼랑과 시원한 폭포수, 그림 같은 집들과 푸른 정적에 닻을 내리고 있는 새하얀 크루즈까지. 피오르드의 벼랑 끝에 풍경의 절정이 걸려 있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 다음으로 많이 찾는 피오르드는 송네 피오르드다. 노르웨이 피오르드 중에서 가장 길고 깊은 피오르드다. 204km 되는 물줄기에 최고 수심이 1,309m에 달한다.
페리가 출발했을 때만 해도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와 별반 차이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곧 물길이 넓어졌고 좌우의 벼랑도 그만큼 더 하늘로 솟구쳤다. 규모만 커진 게 아니라 감동도 함께 증폭됐다.
수많은 기암과 수많은 폭포가 곁을 스쳤고, 벼랑의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마을도 여럿 지났다. 장엄한 설산, 웅장한 협곡. 송네 피오르드에선 감동도 깊게 울렸다.
노르웨이= 글·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 산꼭대기엔 만년설 호수… 계곡 아래엔 울부짖는 빙하…
노르웨이의 해안은 온통 피오르드다. 좁은 바닷물길 아니면 험준한 산줄기가 반복적으로 교차된다. 각 피오르드에 깃든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잇기 위해선 물길을 이용해 배를 타거나 급경사에 놓인, 굽이치는 산길을 넘고 또 넘어야 한다.
배 타고 느끼는 피오르드도 좋지만 이 산을 넘는 길에서 만끽하는 노르웨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개인적으론 구불구불 산길이 주는 풍경이 더욱 매력적이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풍경을 마주한 다음날 일행을 태운 차는 산을 넘어가기로 했다. 갈지자로 휘어 오르는 길은 산꼭대기로 향했다.
저 산꼭대기 만년설이 살짝 덮어 감춰 놓은 빙하를 향해 오르는 길이다. 만년의 전설을 거슬러 오르는 길, 창 밖은 경탄과 감격을 부르는 풍경들로 가득했다.
길은 아래에선 보이지 않던 초록의 아늑한 분지 마을을 지났고, 힘찬 폭포수를 건넜다. 나무가 사라지고 이끼와 낮은 풀들만 자라는, 바람 가득한 고지대에 오르자 백두산 천지와 같은 산정 호수가 나타났다. 그 옆의 산봉우리는 시퍼런 빙하와 만년설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빙하가 녹은 물이 이곳에 고였다가 여러 겹 폭포로 흘러내려 피오르드 바다와 만나는 것이다.
1,500m 높이의 달스니바산 정상 전망대에 섰다. 지나온 길이 실핏줄처럼 이리저리 꼬인 채 까마득한 바닥에 무늬를 새겨 넣었고 푸른 분지 너머로 그 넓던 피오르드가 손톱만하게 자리하고 있다. 만년설을 쓴 산봉우리들이 사방을 가득 둘렀다. 바람이 거셌지만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구름이 가득했던 숭늉빛 하늘은 한 귀퉁이가 갑자기 열리며 밝은 빛 한줄기를 쏟아냈다. 그리곤 무지개가 전망대 아래 벼랑으로 내려앉았다. UFO의 광선이 떨어지듯 그 깊은 골짜기로 색색의 기둥이 내려 꽂혔다. 하늘과 바다, 산과 물을 잇는 무지개였다.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있는 로엔 근처의 올데달린 계곡에는 장대한 규모의 브릭스달 빙하가 숨어 있다. 산과 산 사이 800m 길이로 흘러내리고 있는 진한 푸른 빛의 빙하다.
빙하에 가까이 다가갈 즈음 빙하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을 맞닥뜨렸다. 다리에 힘을 빼면 금세 날아갈 정도로 강력했다. 에베레스트산 베이스캠프 위 아이스폴을 닮은 그 시퍼런 빙하의 유혹에 거친 바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막상 빙하 가까이 다가서자 바람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골바람의 바람 길을 살짝 비켜난 것이다.
푸른 빛의 빙하는 입을 쩍쩍 벌리고 있다. 빙하의 깊은 얼음 틈바구니, 크레바스다. 멀리서 봤을 땐 벌어진 크레바스가 폭풍을 내뿜으며 고함을 치는 것 같더니 가까이서 만난 빙하는 이제 조용히 귓속말을 걸어 온다. 빙하에 귀를 들이댔다. 만년 전, 빙하의 옛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르웨이= 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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