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가 정치인생의 나침반으로 삼는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전 총리 역시 미국과 묘한 긴장 관계에 있었던 정치인이다.
악연의 시작은 1946년 총선 직후. 제1당인 자유당 총재였던 하토야마씨는 연합군사령부(GHQ) 점령 하에서 총리 취임을 앞에 두고 있었지만 돌연 GHQ의 공직추방 명령을 받는다. 1930년 제국의회에서 군축 논의가 한창 일 때 군축파였던 당시 내각에 대해 천황의 통수권을 간섭한다며 공격하는 등 "군부의 대두에 협력한 군국주의자"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5년 뒤 공직추방 조치가 해제돼 정계에 복귀한 하토야마씨는 당시 자유당 총재이던 요시다(吉田) 반대 세력을 결집해 일본 민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취임한다. 그 해 요시다 정권 해산 후 정권을 잡은 하토야마씨는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56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총리 시절 하토야마씨의 대외 정책이 탈 미국 노선이었다. 요시다 정권의 미국 중심 외교로부터 전환을 꾀했던 하토야마씨는 얄타협정 이후 단절 상태이던 소련과 56년 국교를 맺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하토야마 총리와 불가닌 소련 총리의 '소일선언' 서명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소 냉전이 가속되던 때였다.
하토야마 총리는 패전 이후 성립된 '군비 폐기'를 명시한 평화헌법 개정도 지향했다. 일본의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비 확충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일안보조약의 모태가 된 51년 미일안전보장조약을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둘 다 실현되지 않았다.
도쿄=김범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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