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편한 구두가 있느냐고 묻자 구두점의 남자 판매원은 다른 신발가게를 추천했다. 어머니들이 즐겨 신는 일명 '간호사 신발'이었다. 별안간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 브랜드를 말할 때 판매원의 표정이 바뀌었다. 내가 편한 구두를 찾는 순간 그는 나를 자신의 고객 명단에서 제외시키는 동시에 나를 멋이라곤 도통 모르는 여자로 치부해버렸다. 그리고 그의 표정만으로 이렇듯 확대해석하는 내 자신에 더 부아가 돋았다.
그러고보니 그 구두도 그렇고 브랜드들 하나같이 별 뜻 없이 예쁜 어감만을 가진 이름이다. 반대편 편안한 신발 쪽으로 가니 이름부터 달라졌다. 아예 편안함이라는 뜻을 가진 신발도 있다. 몇 년 전 독일에서였다. 낯선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눈에 띄는 상호의 신발가게와 마주쳤다. 메피스토. 파우스트가 영혼을 팔았던 그 메피스토펠레스. 그에겐 한 걸음에 7마일을 가는 장화가 있었다.
대략 11킬로미터이다. 그 장화만 신으면 부산까지 40걸음에 갈 수 있다. 그 이름에 반해 무작정 가게로 들어갔고 부모님의 신발을 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발 치수가 비슷했던 것만 기억났다. 여자 발치고는 꽤 큰 어머니의 신발은 남자치고는 약간 발이 작은 편인 한 선배에게 신어보라고 부탁해서 골랐다. 다행히 두 분 모두 신발이 딱 맞았다. 두 분은 문학적인 그 신발을 '천리화'라고 부른다.
소설가 하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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