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에 3대째 정승이 끊겼으니, 자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공부에 더욱 정진하여 자네 손으로 가문의 명예를 일으켜 세워야 하네."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2007년 여름 대권 도전의사를 포기한 후 펴낸 자서전 <가슴으로 생각하라> 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았던 그는 고등학생 시절 공부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삯바느질로 근근이 다섯 자녀를 키우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항상 아이들에게 '자네'라고 호칭하며 존중해 온 어머니가 '공부 잘 하는 막내'에 대한 기대를 이렇게 드러내자 소년 정운찬은 다시금 공부에 열중한다. 가슴으로>
고려, 조선시대 '정승'은 문무백관 중 최고의 직위. 총리직 권유를 수락함으로써 그는 어머니의 소원을 40여년이 지난 지금 풀어드리고 싶었던 것일까.
궁핍했던 어린 시절
정 후보자는 1946년 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만큼 외떨어진 산골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와 단칸방에서 새 삶을 시작한 일곱 식구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명절과 제삿날 빼고는 쌀밥을 구경조차 못했고, 주식은 미국에서 원조물자로 준 옥수수 가루를 넣고 끓인 죽이었다. 아버지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가정을 꾸렸다.
그는 어린 시절 딸부잣집이었던 숙부의 양자로 입적됐으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숙부가 세상을 떠나고 영장이 나오자 '부선망(父先亡) 독자', 즉 아버지를 여인 외동아들이라는 이유로 징집 연기를 받았다. 이후 1979년데 후반에 최종적으로 징집이 면제됐는데, 이 때문에 17대 대선 후보로 거론될 당시 야권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은인을 만나는 '운'
정 후보자는 금전적인 운은 없었지만 인생의 전환점마다 소중한 은인을 만났다는 점에서는 이름처럼 '운이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학 시절 사제 관계로 만난 조순 전 경제부총리는 그에게 정신적 아버지와도 같다.
고등학생 시절 청계천 헌책방에서 산 <국부론> 을 영어로 읽었다는 뿌듯함에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했지만 수업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그는 "조순을 만나 드디어 경제학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 교수의 수업이 끝나면 칠판을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히 지워가며 가르침을 복기했다. 졸업 후 한국은행에 입사한 때도, 입사 후 1년 반 만에 미국 유학 길을 선택할 때도, 서울대에서 처음 실시한 교수 공채시험에 도전했을 때도, 심지어 청혼을 했다가 장인으로부터 거절 당했을 때도 조 교수는 그를 확실하게 지원해 줬다. 국부론>
서울대 총장 선거와 대권 도전
서울대 총장 시절의 정 후보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지방균형 입학제 등 개혁적인 정책도 도입했으나 본고사 부활 등의 문제로 노무현 정부와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고, 이 때문에 '서울대 특권'을 지키려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총장을 지내면서 얻은 인지도와 뛰어난 학자로서의 이미지, 중도개혁 성향은 정치권의 끝없는 러브콜을 받는 요인이 됐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한국은행 총재 제안을 받았으나 고사했고, 노무현 정부 때도 경제부총리, 국무총리 등의 물망에 올랐다. 특히 17대 대선 당시에는 범여권 제3후보로 거론되며 대선 출마와 신당 창당까지 고려하기도 했으나 결국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을 하겠다"며 평교수 자리로 돌아갔다.
계속된 정치권의 권유를 물리치면서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장래희망을 '국회의원'이라고 당당히 말했던 그의 마음 속에는 정치에 대한 갈망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대선 후보로 거론될 당시 "평생 공부한 경제이론을 실물경제에 접목해 보고 싶은 욕구" "사람 사는 나라, 제대로 된 나라, 품격 높은 나라를 함께 만들고 싶은 욕구" "지금까지 사회로부터 받은 갖은 혜택을 돌려주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정치인의 꿈을 꿨다고 말했다. 총리직을 수락하던 순간까지 그 꿈이 식지 않고 남아 있었던 셈이다.
가족으론 부인 최선주(화가)씨 사이에 1남1녀가 있다.
최진주 기자 parisco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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