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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된 상품에 빠진 마니아들/ "옛 것이 좋은 것이여… 추억을 되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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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된 상품에 빠진 마니아들/ "옛 것이 좋은 것이여… 추억을 되살려요"

입력
2009.09.04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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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하는 얘긴데, 제 별명이 드라마 '대장금'의 주인공과 비슷한 '잔금이'이에요. 그만큼 음식 맛보는 걸 좋아하고, 평가도 즐기는데 지난번 품평단에 뽑히지 못해 너무 서운했어요. 호호호."

2일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농심 회의실. 추억의 과자 '비29' 재출시를 자축하는 번개 모임에서 박시원(34ㆍ여)씨가 출시 전 품평 기회를 놓친 아쉬움을 너스레로 풀어내자, 여기저기서 웃음보가 터졌다. 이날 모임의 주동자는 '카레맛 과자 비29의 재생산을 바라는 카페'로, 농심 직원들도 함께 했다. 회원 대부분이 직장인들이어서 오후 7시에 시작된 모임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비29'는 농심이 국내 스낵시장에 융단폭격을 퍼붓겠다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폭격기 이름을 따 1981년 내놓은 최초의 카레맛 과자. 그러나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10년 만에 사라졌다. 이 비운의 과자가 지난 7월 단종 18년 만에 다시 세상 빛을 봤다. '추억의 공유'로 뭉친 카페 회원들이 농심 홈페이지에 재출시를 바라는 글을 올리는 등 꾸준히 활동한 결과, 회사 측 결단을 끌어낸 것이다.

시장에서 퇴출됐거나 회사 사정으로 생산이 중단된 상품에 열광하는 '단종 마니아'가 늘고 있다.

신제품이 나오면 남들보다 먼저 써봐야 직성이 풀리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와 대척점에 선 이들의 화두는 단연 '추억'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제품, 기술 발전으로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게 된 제품을 구하기 위해 벼룩시장을 뒤지거나 인터넷 경매 등을 통해 원래 가격의 수십 배를 지불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비29' 카페처럼 죽은 상품을 되살려내는 영향력도 발휘한다.

무려 1,700여명 회원을 거느린 '비29' 카페의 구심점도 옛 추억이다. 회원 지경화씨는 "어릴 때 집 앞 구멍가게에는 이 과자를 팔지 않아 큰 길 건너 아파트단지 상가에까지 가서 사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 과자의 실패 원인이었던 자극적인 맛에 오히려 열광했던 일부 마니아는 카레맛 강도를 낮춘 새 제품에 대해 "그 맛이 아니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목적을 달성한 카페는 앞으로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비29'를 살 수 있도록 유통을 늘리는데 활동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얼리 어답터'들의 놀이터인 전자 기기 쪽에서도 '단종 마니아'는 눈에 띈다.

1965년 출시돼 쉬운 조작법과 우수한 품질로 인기를 누리다 82년 단종된 '캐노넷(Canonet) QL17' 카메라도 그 중 하나다. 2002년 9월 결성된 사용자 모임은 현재 국내에서 단일기종 카메라 동호회로는 가장 많은 4,900여명이 가입해 있다. 이들은 격주로 서울 삼청동과 인사동, 영종도 등 서울 근교로 출사(出寫)를 나가 필름 카메라의 매력을 만끽하고 있다.

정환태(25) 부클럽장은 "본래는 디지털 세대지만,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엔 귀한 대접을 받다가 장롱 깊숙한 곳에 처박혀 버린 부모님의 필름 카메라를 우연히 찾아내 그 매력에 빠진 20~30대가 대부분"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찍는 순간 사진 상태를 확인할 수 있고 보정도 쉬운 디지털 카메라와 달리, 필름 카메라는 현상 전까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기대감이 더 크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고 말했다.

단종된 제품을 찾아 발품 파는 재미도 적잖이 쏠쏠하다. 서울풍물시장에서 카메라상점을 운영하는 최용규씨는 "캐노넷 QL17은 요즘 한 대에 10만원 정도 한다"며 "몇 년 사이 두 배나 뛰었지만 필름 카메라치고는 싼 편이어서 요즘 사진학과 지망생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장수 완구 '레고'도 단종 마니아들의 주요 표적이다. 레고는 매년 100여종의 신상품을 쏟아내는 대신 전년도 모델을 포함한 이전 모델은 절대 출시하지 않는 독특한 마케팅을 펼친다. 회사의 이런 상품 전략이 마니아들을 더욱 자극하는데, 단종 모델을 좇는 이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릴 적부터 모은 레고 종류가 약 200여 개에 이른다는 최대식(25)씨는 "요즘 80년대 후반에 나온 모델을 찾아 레고 사용자들이 모이는 국내 사이트는 물론 해외 벼룩시장 사이트까지 돌아다니고 있는데 아직 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사고 싶은 모델이라면 가격이 수십 만원이라도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꼭 사고야 만다"면서 "이쪽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다"고 말했다.

추억을 새로운 방식으로 소비하는 단종 마니아의 세계는 아날로그적 감성의 디지털식 표출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아름다운 추억을 다시 한 번 향유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며 "예전에는 그런 마음만 가지고 있을 뿐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드러내고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태무 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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