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서양사학자에게 여쭈어본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의 <로마인 이야기> 를 읽으셨습니까?""읽었지!" "어떠셨습니까?" "과장과 허구로 가득 찼더군...그런데 감동을 받았어!" 로마인>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사실에 대한 역사학자의 인식과, 과장이나 허구로부터 비롯하는 역사학자의 감동 간의 거리를 어떻게 가늠해야 할지 당혹스러웠습니다. 사실로부터는 얻을 수 없었던 감동을 그 사실에 기초한 허구로부터는 얻을 수 있었다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알듯이 역사는 사실의 기술입니다. 그렇게들 말합니다. 그리고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는 역사의 중요성과 필요성도 압니다. 그것은 이미 겪은 사실에 비추어 지금 여기의 나를 살피고 다가올 내일을 조망하려는 일입니다. 따라서 역사기술은 거울의 표면 만들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을 투명하게 반사하게 해야 하고, 굴곡이 없어 상(像)의 왜곡이 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이 이른바 역사기술의 의도를 넉넉히 충족시켜 주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역사는 그가 '알프스 산을 넘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서술합니다. 우리는 그 서술을 통해 그 사건을 '이해'합니다. 그 사건의 소이연(所以然)을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마저 서술하고, 그 영향이 지금 여기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도 기술합니다.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아직 그 역사적 사건이 내 실존에 와 닿는 의미이기에는 한참 부족합니다. 역사주체에 대한 인간적 공감, 그 사건으로부터 비롯한 실존적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설은 '그는 알프스 산을 넘어가면서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다'고 말합니다. 사실이 담지 않은 그의 고뇌, 꿈, 그리고 인간적 비애, 아니면 게걸스러운 욕망까지를 모두 담습니다. 그 생각을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소설가의 상상이 빚은 허구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역설적이지만 그 산을 넘으며 그가 어떤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첨가할 때 마침내 역사는 스스로 역사기술의 의도를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역사가 의미를 낳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있지도 않은 사실을 첨가해 역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알프스 산을 넘는 주인공의 생각을 독자가 자기의 심상(心想)에 떠올리도록 해주지 않으면 그 역사는 기술된 것도 아니고 읽힌 것도 아닙니다. 그 심상이 떠오를 때 비로소 역사는 이해를 넘어 감동으로 내 삶에 스미면서 의미의 실체가 됩니다. 역사는 그렇게 내 안에 현존합니다. 그런데 곤혹스러운 것은 사실성 자체를 준거로 하여 이를 살펴보면 사실성이 상당한 '훼손'을 겪어야 그 사실은 비로소 의미를 낳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겪어온 신화와 역사간의 오랜 긴장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태를 명확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한동안 신화는 역사 이전의 허구라고 단정됐습니다. 원시적 상상력이 그려낸 유치한 이야기로 여기면서 실증적으로 참인 역사를 위해 서둘러 제거해야 한다고들 말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우리네 일상적인 이야기가 사실을 전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신화는 의미를 담은 역사, 곧 역사에서 비롯한,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다 걸러내고 그것이 담고 있을 의미만을 담은, 그래서 결과적으로 허구가 되어버린, 그러한 이야기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화는 역사 이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가 기술되는 자리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새롭게 읊어지고 기술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화는 역사가 쓰는 시(詩)라고 하는 새로운 신화 인식이 이를 잘 드러내줍니다.
사실을 기술한다고 했을 때 이를테면 '로마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메마른 인식만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로마사'가 살아나 우리에게 말을 겁니다. 하지만 '로마인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로마사'가 없었다면 '로마인의 이야기'가 아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럴 뿐만 아니라 '로마인 이야기'가 '로마사'를 허구 안에서 해체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둘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릇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이러합니다. 그 선생님은 사실과 허구와 감동이 지니는 일
련의 긴장을 역사학자의 자리에서 그처럼 간결하게 밝혀주고 계신 것입니다.
되풀이 됩니다만 사실의 기술은 '참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물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참 이야기에 터한 '다른 이야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실을 준거로 해서 보면 꾸며낸 '가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지혜를 얻기도 하고 희열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이야기란 근원적으로 '사실(역사)지키기'와 '사실(역사)지우기'라는 역설적인 것의 혼란스러운 공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만의 이야기도, 허구만의 이야기도 실은 우리네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화자이든 청자이든 이야기가 지닌 이른바 '역사(사실)지키기'와 '역사(사실)지우기', 곧 역사와 신화 사이의 긴장을 스스로 의식하면서 이를 유지하는 일입니다. 그 긴장이 이완되면 우리는 사실에 고착되어 의미를 잃든가, 아니면 허구에 사로잡혀 현실에서 일탈하든가 하게 됩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삶이 아닙니다.
최근 우리는 연거푸 큰 분들의 죽음을 겪었습니다. 삶이 굵고 컸던 분들의 죽음자리에서는 언제나 많은 이야기들이 솟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들이 한 일들이 우리네 삶을 주조(鑄造)하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이 사라진 휑한 자리에서 숱한 이야기들이 분출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태어남의 이야기에서 비롯하여 성장과정, 실패와 좌절, 마침내 성공의 극에 이르러 누리고 행한 엄청난 일, 그리고 죽음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장엄하고 신비스럽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그 이야기들은 짙은 신화의 색깔을 띱니다.
하지만 바로 이 계기에서 우리는 단단히 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사실(역사)지키기와 사실(역사)지우기의 평형이나 긴장이 깨지거나 이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정직한 인식, 아니면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빙의(憑依)된 현실을 빚을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수단의 이야기꾼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자, 여러분에게 제가 이야기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실은 거짓말입니다.' '그래도 좋아요!' '하지만 몽땅 거짓말은 아닙니다!' '알아요. 좋습니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일은, 그리고 신화를 이야기하는 일도, 어쩌면 이렇게 펼쳐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정진홍 이화여대 석좌교수·종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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