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연극에 대한 꿈과 미련, 내가 가끔씩 '운'이라고 말하는 패션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 힘들 때마다 지금껏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던 내 꿈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패션을 시작한지 올해로 꼭 30년이 되었고 내 이름으로 브랜드를 시작한지도 25년이나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디자이너로 일을 해오면서도 나는 아직도 가끔씩 나에게 만약 정말로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이 일을 그만 두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비록 주위 사람들은 나를 '성공한'디자이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론 여전히 나는 '진행 중'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여전히 파리에 나가기 위해 매번 고민하고 있고, 또 세계적인 브랜드들이 넘쳐나는 그 곳에서 나는 아직까지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신인 디자이너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인터뷰에서 나이를 물어 보면 '아직도 진행 중인 서른 일곱'이라 답하곤 한다.
내가 패션디자이너를 선택한 건 아주 우연이었다. 나는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과에 진학했는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갖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남들보다 유달리 꿈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학창시절, 문학과 미술을 좋아하는 '끼'는 있었지만 조용한 학생이었던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한번 글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에 작가를 꿈꾸며 방송연예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지금은 문예창작과가 있지만 내가 입학할 당시 작가지망생들은 방송연예과를 지원하였다.
그런데 글을 쓰기로 하고 입학한 학교에서 나는 글 보다 연극에 빠져들었다. 연극을 통해 자기 내면세계를 몸짓으로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나에게 충격적일 만큼 강렬했다. 그래서 내가 평생 가야 할 길이 연극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선택한 길은 순탄치가 않았다. 당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만 됐던 나에게 배고픈 연극인으로서의 직업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생계 때문에 연극을 할 수 없다면, 아예 시작하기 전에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한번 무대에 서면 그 감동 때문에 영원히 무대를 떠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결국 첫 공연 일주일 전 도망치듯 빠져나오면서 연극에 대한 꿈을 접었다.
이 결정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도망쳤다는 자책감이 더 컸다. 그래서 그 때 나는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을 하게 되었다. 내가 패션쇼를 위해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만큼 몰입하는 것도 이런 다짐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극에의 꿈을 접은 뒤 곧바로 나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지 않았나. 당시 수선집을 하던 친구의 '먹고 살만하다'는 말만 믿고 신문에 난 국제복장학원의 광고를 보고 찾아가기로 결심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복장학원은 내가 매일같이 걸어 다니는 학교 앞 골목에 있었다. 수없이 그 앞을 지나다녔지만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던 그 곳이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묘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가끔 나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나는 '행운'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지금 이야기처럼 아주 우연한 기회로 시작한 패션이 그렇고, 먹고 살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믿고 단순히 수선집만을 생각해 시작한 일에서 패션디자이너로 클 수 있었던 것도 나에겐 모두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옷과 씨름하며 하루 종일 옷에만 매달렸다. 이렇게 1년간의 과정이 끝나갈 무렵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공부를 마칠 무렵 그 곳에 국제 패션디자인연구원이라는 과정이 만들어 졌다. 당시 복장학원에서 옷을 만드는 기능적인 기술만 배웠다면 국제 패션디자인연구원은 내가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눈을 뜨게 만들어 준 곳이었다.
그곳은 최경자 선생님께서 당신 인생의 마지막 꿈이라는 생각으로 만든 곳인데 지금으로 치면 대학원같이 당시 외국에서 경험을 쌓은 최고의 교수진들로 구성되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처럼 학생과 교수들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공부하는 데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매우 열정적인 수업이 진행되었다.
1980년 국제 패션디자인연구원을 마치고 기성복 업체에서 디자이너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의 흥분과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명동 거리에서 내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여성을 처음으로 보고 뒤쫓아 간 적도 있을 정도로 옷을 만드는 일이 나에게는 너무나 즐거웠다.
기성복 디자이너로 일하며 지금도 많은 신진 디자이너들을 배출하고 있는 중앙디자인 콘테스트에 의상을 출품해 입상하게 되면서부터 '이상봉'이라는 디자이너를 알리 수 있는 기회 또한 얻었다.
당시 명동은 최고의 패션 중심지로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곳에 매장을 열었는데, 그러던 중 1985년 드디어 나도 내 이름 석 자를 내걸고 명동 제일백화점 4층에 첫 매장을 마련하며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 패션쇼를 하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았고 신인이었던 나도 중앙디자인 그룹전에 참가하면서 패션쇼를 시작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패션쇼 의상은 일상생활에서 소화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거나 거창한 의상이어서 판매를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패션쇼 이외에 다른 옷들을 만들 여유가 없었던 나는 패션쇼에 선보인 의상들로 매장을 꾸몄는데 의외로 반응이 상당이 좋았다.
옷을 만들어 매장에 걸자마자 팔려 나갈 만큼 이름이 알려지게 되자, 당시 재래시장 여러 곳에서는 의상을 출고한 다음날이면 그 옷들을 그대로 만들어 판매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었다. 그래서 당시 나에겐 최단시간에 성공한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붙여지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패션에 그 만큼 열정적으로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꿈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사랑했던 것을 포기하고 난 후 택한 길이었기 때문에 두 번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그리고 그 보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했던 것만큼 운도 많이 따라주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의 감각은 우리 세대보다는 분명 앞서 있다. 하지만 열정은 부족한 것 같다. 누구나 가장 절박할 때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젊은 후배 디자이너들을 사석에서 만나면 항상 그들에게 '꿈과 열정을 가진 디자이너가 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된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