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일본 정부와 재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일본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다음 날인 31일. 미 국무부 이언 켈리 대변인의 발언이 민주당 지도부를 적잖이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미 대등 외교'를 공약으로 내세운 민주당이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는 오키나와(沖繩)현 후텐마(普天間)비행장 등 주일미군 기지 재배치와 괌 이전 문제를 자민당 정권과의 합의대로 진행하겠다고 먼저 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향후 미일 관계가 순탄치 않을 수 있음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같은 날 백악관 기자회견에서는 최근 뉴욕타임스 등에 실린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의 글이 화제가 됐다. 지난 달 일본 월간지에 발표된 글을 요약한 이 기고문에서 하토야마 대표는 미국의 도를 넘은 시장원리주의를 비판하며 동북아공동체 구축을 강조했다. "일본의 새 지도부는 미국 종속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만들 것 같다. 미일관계가 바뀌는 거냐"는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로버트 기브스 대변인은 "미일 관계 유지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서도 "하토야마 대표가 어떤 의미로 종속이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일본 민주당은 창당 초기부터 '대등한 대미 외교'를 기본 정책으로 삼아왔다. 주일미군기지 이전ㆍ방위비 분담금ㆍ미일지위협정 개정과 해상자위대의 인도양 다국적군 급유활동 지원 재검토가 민주당 대미 정책의 핵심이다. "일본은 미국의 거대한 항공모함"이라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는 자민당과 반세기 넘게 동맹을 유지해온 미국으로서는 민주당을 불안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집권으로 미일관계가 전환점을 맞을 것으로 보는 시각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다소 변화는 있겠지만 민주당이 미국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기존의 미일 관계를 바꾸는 모험을 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참의원 선거 승리 후 정권교체를 시야에 넣고 있던 민주당 지도부는 미국 주요 인사들과 만남을 꺼리지 않았다. 오카다(岡田) 간사장은 지난해 12월 방미, 민주당의 수권 능력과 대미 정책을 설명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당은 미국과 대립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는 정책을 하나 둘 수정했다. '오키나와현 밖으로 기능을 분산하고 해외 이전을 목표'로 했던 후텐마비행장은 '재검토'로, '미일지위협정 개정 착수'는 '문제 제기'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바뀌었다. 그 동안 수 차례 법안 통과를 반대해온 인도양 급유지원도 '내년 1월 기한 만료 후 재검토'로 완화했다.
적어도 내년 참의원 선거까지 '안전운행'해야 하는 민주당이 당장 대미 정책에서 자민당 정권과 차별화 할 수 있는 카드는 주일미군 관련, 미일지위협정 개정과 미군 주둔비 분담 재검토 정도이다. 집권 4년 동안의 미일관계 청사진은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의 10월 일본 방문 결과와 올해 말 이후 나올 민주당의 인도양 급유지원법 대안 내용 등에 따라 그려질 것으로 보인다.
도쿄=김범수 특파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