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최고(最古) 신라비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포항 중성리신라비'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지난 5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중성리신라비를 분석 중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비문은 재물이나 토지 등 재산과 관련된 소송의 판결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1일 말했다.
도로공사 현장에서 주민에 의해 발견된 중성리신라비는 최대 높이 104㎝, 최대 폭 49㎝, 두께 12~13㎝, 무게 115kg의 자연석 화강암의 한 면에 음각으로 12행 203자의 한자를 새겨 넣은 것이다. 발견 당시에는 '학성리비'로 보고됐지만, 정밀 측량 결과 발견 지점이 학성리가 아닌 중성리로 확인돼 명칭이 교체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판독 결과 비문은 '과거에 모단벌의 것(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며, 향후 이에 대한 재론을 못하도록 한다'는 평결과 함께 그 과정과 관련 인물 등을 반포해 현지인과 후세에 경계를 삼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구소는 중성리비에 대한 조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 '포항 중성리신라비'를 발간하는 한편, 3일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에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관련 연구 내용을 발표한다. 심포지엄에서는 특히 제작 시기에 대한 부분이 가장 중점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연구소는 제작 시기에 대해 "논란이 있으나 현재까지 연구 결과로는 늦어도 지증왕 2년인 501년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중성리비의 시기를 알려주는 단서는 비문 맨 앞에 새겨진 '신사(辛巳)'라는 간지. 연구소는 비의 형식이나 서체, 등장하는 6부의 명칭과 관직명 등을 종합해 5, 6세기임을 확정지었고, 이 즈음의 신사년인 441년, 501년, 561년 중 501년이라는 데 무게를 둔 것이다.
이전까지 신라 최고비로 알려진 영일 냉수리신라비(국보 264호)가 50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이제 최고비 기록의 주인공이 중성리비로 바뀌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는 441년과 501년을 놓고 의견이 다소 엇갈리고 있다.
심포지엄에서 '어문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권인한 성균관대 교수는 이 비가 연구소의 추정 연대보다 60년 빠른 441년에 제작될 가능성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 근거는 비문의 앞부분에 나오는 '○盧'. 권 교수는 이를 '사로(斯盧)'로 판독했다. '사로'는 신라(新羅)나 사라(斯羅)에 앞서 사용된 신라의 국호 표기로, 3~4세기 경의 중국 문헌에 나타난다.
그러다 5세기 말의 기록에서는 '사라'로 바뀌고 있고, 503년 영일 냉수리비는 '사라'로 적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중성리비의 건립 연대는 냉수리비의 시기보다 좀더 앞선 441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반면 '내용과 제작시기'라는 논문을 발표하는 이우태 서울시립대 교수는 '○盧'를 '절로(折盧)'로 읽고, 지증왕(재위 500~514년)을 지칭하는 말인 '지철로(智哲老)'와도 연관시킬 수 있는 만큼 501년이 유력하다는 견해를 표시했다.
또 비문에는 '사탁(沙喙) 사○지(斯○智) 아간지(阿干支)'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이 냉수리비에 나오는 '사탁(沙喙) 사덕지(斯德智) 아간지(阿干支)'와 동일인물이라면 501년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심포지엄에서는 비문에 대한 '금석학적 검토'(선석렬 부산대 교수), '서체와 고신라 문자생활'(고광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에 대한 연구결과도 함께 발표된다.
중성리비 실물은 2일부터 9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에서 최초로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저작권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