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멍이네 꿀꿀이는 '멍멍' 해도 '꿀꿀' 하고, 꿀꿀이네 멍멍이는 '꿀꿀' 해도 '멍멍'한다."
지난달 24일 서울 서초구 방배노인종합복지관 강의실. 동화구연 강사 배관순씨가 "정확한 입 모양으로 다 같이 시작"이라고 하자, 강의실은 어르신 20여명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요란했다. 어르신들은 '멍멍' '꿀꿀' 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오므렸다 하느라 인상까지 찌푸려졌다.
"이제 발음을 안 틀리고 정말 또박또박 잘 하시네요." 배씨의 칭찬에 어르신들의 표정이 어린애마냥 금세 환해졌다. 매주 월요일마다 진행되는 '좋은 조부모 되기 동화구연' 강좌의 한 장면이다.
수강생 대다수는 자식들부터 손주까지 아이 키우는데 '이골이 난' 할머니들이지만, 육아에는 젬병일 법한 할아버지도 두 분 눈에 띄었다. 강의실 한 가운데 나란히 앉은 권택전(64) 김원규(70)씨다. 권씨는 생후 19개월인 친손녀 하연이를 1년 4개월째 돌보고 있다. 큰 아들이 한의원을 개업하고, 며느리도 공기업에 다니면서 손녀 양육은 자연스레 권씨 부부의 몫이 됐다.
6월 말부터 동화구연 수업을 들은 권씨는 "집사람과 같이 애를 보는데, 이제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한 손녀에게 동화책을 더 재미있게 들려주고 싶어 배운다" 말했다. 손주 7명을 둔 김씨는 "손주들을 직접 돌보진 않지만 주말에 찾아오면 같이 놀아주려고 시작했다"면서 "요즘은 손주들 요청에 전화로 동화를 들려주기도 한다"고 했다.
부모 댁에 아이를 맡기는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육아 초보'인 할아버지들도 '육아 전선'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황혼에 때아닌 육아 스트레스도 만만찮지만, 육아교실은 기본이고 동화구연에 영어회화까지 수강하며 손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들고 있다.
방배노인복지관이 매주 월ㆍ수요일 진행하는 '손주에게 알려주는 ABC' 강좌도 어르신들의 열의로 뜨겁다. 수강생 20여명 중 할아버지는 4명. 지난달 26일 강의에서 어르신들은 'th' 발음을 배우느라 진땀을 뺐다.
여덟 살, 여섯 살 손주와 함께 사는 김진근(72)씨도 강사를 따라 'mouth'를 발음하려고 혀를 연신 움직여 보지만 쉽지 않은 표정이었다. 김씨는 "선생님이 '혀를 올려라 굴려라, 입술을 벌려라'고 하는데 잘 안 된다"면서도 "집사람은 한 달 만에 그만뒀지만 나는 그래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을 듣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손주가 학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나한테도 자꾸 물어보는데 제대로 된 발음을 가르쳐 줘야하지 않겠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수첩에는 알파벳부터 시작해 그동안 배운 간단한 회화 문장이 빼곡히 적혀있다.
할아버지들 대부분은 갓 육아를 시작한 서툰 '초보 엄마'와 다름없다. 젊은 시절 가족 부양하느라 바깥일에 매달려 아이들 키워본 경험이 없다 보니, 손주 돌보기는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목욕시키고, 기저귀 갈아주고, 밥 먹이는 것부터 실수 연발은 기본이다.
권택전씨는 "손녀가 기저귀에 똥을 싸도 할머니는 손으로 잘 씻겨주던데 나는 (손을 내 저으며) 어휴,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샤워기로 씻겼지. 그런데 깨끗이 안 씻겨졌나봐. 집안에 냄새가 모락모락 나지 뭐야. 할머니한테 엄청 혼났어" 하며 '허허' 웃었다.
할아버지들은 그렇게 좌충우돌하면서도 나름의 육아 노하우를 익혀가고 있다. 권씨는 "처음엔 고무장갑을 끼고 아이를 씻겼지만, 이젠 맨손 목욕도 자신 있다"며 "요즘은 하연이가 목욕할 때 할머니보다 나를 더 찾는다"고 말했다.
두 딸 부부와 아들 내외 등 18명의 대식구가 한 건물에 함께 살면서 5명의 손주를 돌보는 한수덕(68)씨는 "손주들이 밥을 잘 안 먹을 때 숟가락에 밥과 고기반찬을 얹어 '누구 먼저 줄까'라고 경쟁심을 유발하면 한 그릇은 후딱이다"고 말했다. 한씨는 손주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물놀이도 배우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손주 돌보기는 때론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된 일이다. 김진근씨는 "애들이 말을 듣지 않고 쇼파나 침대 위를 마구 뛰어다니는 걸 말릴 때는 힘이 쏙 다 빠진다"고 말했고, 한수덕씨도 "손주들끼리 서로 싸우는 걸 말리고, 우는 애들 달래주는 게 여간 힘들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할아버지들은 그래도 "손주 돌보는 낙으로 산다"고 입을 모은다. "젊었을 때는 가족 부양 부담에다 일에 치여 사느라 몰랐는데, 이제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다"는 것이다. 한수덕씨는 "손주들이 그렇게 예쁠 수 없다"면서 "손주들과 놀면서 스트레스를 푸니 동네 친구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집이 됐다"고 자랑했다.
다른 할아버지도 "학원 다니느라 바쁜 애들의 메마른 감수성을 살려주기 위해서 저녁 노을도 같이 본다"며 손주 돌보기 예찬론을 폈다. 한국씨니어연浪맛?신용자 회장은 "할아버지들이 집안 일에 손 대지 않는 것을 당연시 여겼던 세대이다 보니 아직 '무슨 애를 봐주냐'며 꺼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며 "보육을 즐겁고 보람 있는 일로 여기는 풍토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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