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유식 칼럼] 한은의 출구를 막지 말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유식 칼럼] 한은의 출구를 막지 말라

입력
2009.09.01 08:56
0 0

한국은행 사람들은 스스로를 '걱정을 사서 하는 집단'이라고 부른다. 민감하고 잡기 힘든 통화정책을 다루다 보니 우산 장수와 짚신 장수를 함께 둔 부모의 마음처럼 자나깨나 걱정이 끊이지 않는 처지를 표현한 것이다.

올 봄 런던 G20 정상회의 합의문에 언급된 출구전략 논의가 선진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그 중심에 선 한은은 걱정병이 다시 도져 깊은 시름에 잠겼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재정지출과 저금리로 돈을 푸는 입구전략 때는 정부와 보조를 맞추면 됐다. 그것이 글로벌 합의여서 책임과 부담도 덜했다.

대통령 잇단 시기상조론 곤혹

그러나 이달 말 열리는 피츠버그 G20 정상회의가 유동성 회수의 방법과 시기를 논의하는 출구전략을 의제로 삼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회복 조짐의 불씨 확산이 우선인 정부는 확장적 거시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곳간에 별로 남지도 않은 돈을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신경 쓰면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말 그대로 제비 한 마리, 오동잎 한 잎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듯 통화정책을 최소 3개월, 평균 6개월 이상 선제적으로 운용해야 하는 한은은 엄청난 중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중반 한은의 잘못된 저금리 기조가 유발한 과잉유동성이 부동산 광풍 조장에 일조했다는 비판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다. 더구나 풀린 돈이 생산현장보다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으로 흘러 거품을 부풀리는 상황 아닌가.

사실 작금의 큰 지표만 보면 한은이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제안처럼 여섯 달째 2%에 묶어둔 금리를 올리는 등 돈을 거둬들이는 출구전략을 고민할 만하다. 성장률 추이와 전망은 예상을 뛰어넘고 소비자심리지수는 7년래 최고치이며 부동산 및 주식 가격은 오히려 과열이 우려되고 있다.

기업의 실적 호조에 힘입은 경기기대와 전망, 금융시장 역시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전의 밝은 톤을 회복했고 경상수지와 외환수급도 정상을 되찾았다.

반면 더 큰 고민이 있다. 지표경기와 체감경기가 따로 노는 문제다. 선두에는 희망근로사업과 일자리나누기 캠페인으로 간신히 버텨가는 고용시장이 있고, 날로 악화되는 가계수지, 소비ㆍ투자 부진이 그 다음이다. 다른 편에는 글로벌 경기의 불확실성이 있다.

비이성적 과열과 비전통적 처방이 남긴 잔해인 금융시스템의 손상, 과잉생산력, 공공부문의 취약성, 만성화하는 소비침체, 보호주의 확산 등은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등 비관론자가 아니더라도 세계 경제의 더블딥(2차 하락) 가능성을 부인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변수가 어지러우니 출구전략에 대한 한은의 태도는 요령부득이고 때론 기회주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요약하면 "타이밍과 방법을 따져보고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한다고도, 안 한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와 청와대 등 곁꾼들의 주제넘은 훈수가 부담스러워도 무대응이다. 시기상조라는 판단이 한은의 독립적 정책결정을 해친다고 쏘아붙일 법도 하지만 "말도 못하느냐"는 대꾸가 나오면 더 이상 문제 삼기도 어렵다.

하지만 한은의 속앓이는 아랑곳없이 이명박 대통령이 한 달 전에 이어 지난 주 또다시 올해 중 출구전략은 시기상조라고 못박은 것은 꼭 짚고 넘어갈 일이다. 국내외 분석과 관측을 토대로 한 상식적 언급이라 해도 대통령 발언의 무게와 파장을 보는 시장의 눈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사공일 무역협회장 등 대통령 측근들까지 맞장구를 쳤으니 시장은 한은이 섣불리 튀는 짓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미 감을 잡았을 것이다. 한은 입장에선 청진기와 메스로 조심스레 헤집고 들여다보던 환부에 돌연 식칼과 망치가 날아든 셈이다.

'지침성'발언 시장예단 부추겨

정부는 생래적으로 확장 성향이고 중앙은행은 본질적으로 안정 성향이다. 이런 균형과 견제가 유지돼야 경제가 잘 굴러간다. 대통령의 말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는 자칫 이런 역학관계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부-정치권-재계의 3각 동맹이 시기상조론을 합창하며 한은을 압박하는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를 초반부터 그로기 상태로 내몰면 그 대가와 후유증은 누가 감당할 것인지 참으로 걱정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