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을 해놓고 농사를 지으러 집에 내려가서는 중풍으로 누워 계시는 아버지 치료를 위해 침 잘 놓는다는 돌팔이 의사들을 모시러 다녔다. 병원치료는 그 때 엄두도 못 냈다. 어머니는 거름을 머리에 이고 논으로 밭으로 다녔다.
비료가 귀한 그 때 거름은 불을 때고 남은 재와 퇴비 그리고 대소변 등이었다. 나의 학비를 마련한다고 콩 깨 팥 고추 등을 머리에 이고 십 리가 넘는 김제 장을 늘 가셨으며, 집 뒤 대숲에서 대를 끊어 한 묶음 질질 끌고 가서 팔기도 하셨다. 그렇게 해보아야 몇 푼이나 되었을까.
여동생 박순은 나보다 다섯 살 아래여서 그 때 열네 살 이었는데 영특하고 똑똑했다. 중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나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간호 하면서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했고, 내가 없을 때는 사실상 가장역할을 해냈다.
다섯 살 위인 누님 박윤은 출가하여 이웃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마다 내 가슴에는 그 무엇이 치밀어 올랐으며 이것이 내게 강력한 성장동력을 불어 넣지 않았나 싶다.
서울대의 등록금은 1956년 봄 학기의 경우, 그 때 돈으로 2만8,700환으로 사립대학의 절반도 채 안 되었다. 그 때 나는 등록금을 쌀로 셈해야 실감이 났다. 한 학기 등록금이 쌀값에 따라 3~6가마(당시 한 가마는 90킬로그램)였다.
킬로그램 당 소매 2,300원 정도 되는 요즘 쌀값으로 치면 백만 원도 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때 한 달 하숙비가 쌀 1가마 남짓 되었던 점 등을 기준으로 본다면 요즘 돈 200만 원 쯤 되지 않을까 싶다. 2009년 봄 학기 서울대 사회계열 등록금 254만원과 대차가 없는 것이다. 그 만큼 그 때 쌀의 상대가격은 비쌌던 것이고 내게는 그것이 매우 무거운 부담이었다.
봄 학기보다 가을 학기 등록이 더 어려웠다. 9월 학기 등록은 8월말에 하는데 이 때는 쌀도 보리도 모두 떨어질 때일 뿐 아니라 추곡은 한 달 이상 있어야 나오기 때문에 항상 빚을 얻어 마련해야 했다.
빚은 이자가 싼 경우는 장리,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곱 배기였다. 장리란 쌀 한 가마에 한 두달 뒤 추수하여 한 가마 반을 주는 것이고, 곱 배기란 두 가마를 주는 것이다. 엄청난 고리임이 분명하지만 그 때는 이것을 얻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대여섯 집을 들러서도 빚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하다 보니 부채는 쌓여만 갔는데 설상가상으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그 때 김제에서는 정미소에서 방아를 찧어 현금화할 쌀은 집에 가져오지 않고 미곡상에 맡겨 보관증을 받고 필요할 때 대금을 받아쓰는 관행이 있었다. 나도 쌀 다섯 가마를 여기에 맡기고 있었는데 그렇게 신용이 좋다는 이 미곡상이 부도를 내서 보관증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2학년을 마친 뒤의 1956년 겨울방학 때 일이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속담이 있는데 어차피 버티는데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던 나는 차제에 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군복무 기간은 3년이 넘었는데 대학 재학 중에는 입영이 연기 되었다. 지원입대 하기 위해 김제경찰서를 찾았던 바 담당자인 병사주임 정병옥(丁炳玉) 경위는 나에게는 구면이었다.
그 얼마 전 까지 경찰관들이 일터나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을 잡아 군인으로 데려갔는데 우리 마을의 박순기라는 내 또래 사람이 논에서 일하다가 잡혀서 경찰서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병석에 누워 있는 조부모를 부양하고 있는 영세민으로, 이 사람이 군에 가면 그 두 노인이 생존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마을 사람들의 도장을 받아 진정서를 만들어 경찰서를 찾아 갔는데 마침 담당자가 정병옥 경위였으며 그분의 도움으로 그 사람이 풀려난 일이 있었다.
그 분은 나에게 지금 군에 가지 말고 어렵더라도 학업을 계속하라며 지원입대를 강력히 만류하는 것이었다. 그 근거로는 나의 앞길이 창창한데 3년 이상이라는 기간이 너무 긴 공백이라는 점, 그리고 2년 또는 1년 반의 학도병 단기복무제가 연내 시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들었다.
나는 재고 해 보겠다고 그 자리를 물러나 생각한 끝에 그분의 권고를 따르기로 하였다. 단기복무제에 대한 그분의 언급이 특히 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 뒤 내가 1년 반의 단기복무를 마치고 어느 때인지 그 분의 소식을 알고파 김제경찰서를 찾은 일이 있는데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3학년 봄 학기 등록을 마치고 학업을 계속했다. 그러자 2학기에 접어들면서 학도병의 1년 반 단기 복무제가 시행되고 드디어 내게 1957년 11월 7일에 서울에서 학도병으로 입영하라는 징병통지서가 왔다. 기쁨으로 이 통지서를 맞은 나는 바로 고향에 내려가 인사도 構?주변도 정리하고 올라와 입대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학교에서는 11월2, 3 양일에 제1회 전국 대학생 경제정책 토론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거교적으로 그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1년 선배로서 4학년이던 황창기(은행감독원장), 김채겸(국회의원), 이규행(작고, 한국경제신문사장), 김식현(서울대 교수), 한병길(재미) 등 기라성 같은 실력파들이 교내 학술활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나는 이 대회가 입영일자 직전이어서 참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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