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탈이데올로기, 탈사회, 탈이슈를 내건 이른바 '3탈(脫) 영화'들이, 국내 극장가를 수 년간 점령했던 흥행 공식에 일대 수정을 가하며 충무로 흥행 지형을 흔들고 있다.
'과속스캔들' '7급 공무원' '해운대' '국가대표' 등 사회적 의미를 덜고 재미를 더한 순수 대중영화의 잇단 관객몰이가 그 변동의 방증이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 '화려한 휴가' 등 역사적 의미를 띠거나 사회적 메시지를 전파하며 이슈를 촉발했던 기존 흥행 영화의 영광은 점차 빛이 바래고 있다.
■ 진중함은 가고, 가벼움만 오라
최근 충무로 흥행 공식의 주요 덕목은 가벼움이다. 충무로 흥행 공식 변화의 신호탄을 쏜 '과속스캔들'이 대표적이다. '과속스캔들'은 미혼모와 미성년 출산이라는 사회적으로 민감하고 무거운 소재를 다루었으나 그 어둠을 묘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웃음기 스민 따스함으로 불황에 지친 관객의 마음을 달랬다. 묵직하게 만들만한 영화임에도 애써 진중함을 피한 것이다.
영화가 가벼워지면서 코믹이 독보적인 흥행코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형 재난영화를 표방한 '해운대'도 감동의 쓰나미를 강조하지만, 관객들은 영화 밑바닥에 흐르는 웃음에서 적지 않은 재미를 찾는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올해 흥행 영화는 모두 코믹하거나 유머가 있다"며 "요즘 관객은 애수나 슬픔 등 깊은 정서를 건들기 보다 부담 없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내용을 원한다"고 분석했다.
■ 관객의 재탄생인가
순수 대중영화의 부상은 관객의 입맛 변화와 묶여있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민족 정서와 사회적 관점을 이야기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개념 영화'와 '개념 관객'의 시대가 가고 있는 것이다.
관객의 취향이 급변하면서 '관객의 재탄생'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한국 관객은 오락을 오락으로 즐기지 못할 정도로 과도한 의미 부여에 찌들려 있었다"며 "이제는 오락을 자유롭게 즐기고 거기서 위로를 얻는다"고 말했다. 전씨는 "'해운대'를 기점으로 '실미도'처럼 사회적 문제의식을 지닌 흥행작은 앞으로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심재명 MK픽처스 대표도 "대형 흥행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의 세대가 달라졌고 흥행을 이끄는 관객층도 바뀌었다"며 "대중영화의 인기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라고 강조했다.
■ 지나가는 바람인가
대중영화의 강세가, 침체를 벗어나려는 충무로의 몸부림이 부른 짧은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관객 취향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영진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는 "최근 흥행작들은 조각난 내러티브에 신파와 웃음을 버무렸던 조폭영화 시리즈와 다를 바 없다"며 "무리한 이야기를 요령으로 이끌어가는 영화들은 주류가 되기 힘들다"고 전망했다.
영화 홍보마케팅사 영화인의 신유경 대표도 "이슈를 만들어 영화를 흥행시키는 시대는 끝났다"면서도 "코미디가 크게 유행하면 멜로가 보고 싶듯 최근 대중영화의 강세는 관객 취향의 단기적인 변화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중영화의 득세에 대해 비판적 시선도 존재한다. 심영섭씨는 "침체기 한국영화계에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의미를 지닌 영화에 대한 야심의 부족은 영화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꼬집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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