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그의 충무로 사무실을 찾았을 때 커다란 액자가 눈길을 끌었다. 그는 1989년 2월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는데 직원들이 그의 영화계 진출 20주년을 기념해 선물로 액자를 만들어 준 것이다. 그가 마케팅을 담당하고 카피를 썼던 800여편의 영화 중 고르고 고른 수십 편의 영화 포스터가 각자의 몸집을 줄여 액자를 뒤덮고 있었다.
그는 짧은 회상에 잠겼다. "강우석 감독과의 첫 만남 등 지난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은 족히 나올 거고 재미도 있을 거야." 신문 연재를 권하자 그는 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럴 시간이 없어서…"
그날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벚꽃 비 내리는 4월 점심 한끼 하자는 약속은 허공 속에 묻히고 말았다. '왕의 남자'의 프로듀서를 맡고 제목까지 만들었던, '지독한 범인 악독한 형사'('공공의 적') '내공 걸고 밀어내기, 목숨 걸고 버티기'('달마야 놀자') '꿈에서는 해도 되나요?'('몽정기') 등의 재기발랄한 카피를 써냈던, 그리고 '도마뱀' '라디오스타' '즐거운 인생' 등을 제작했던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는 5월 17일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말대로 시간은, 야속하게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8월 27일 그가 몸 담았던 아침과 영화사 씨네월드, 타이거픽처스가 새 둥지를 마련한 경기 고양시의 한 사무실을 찾았다. 이준익 감독의 신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제작 개시를 알리는 고사를 지내는 자리였다.
정승혜 대표의 유작이 된 '불신지옥'에 출연해 "고인에게 선물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찍었다"며 시사회장에서 눈물을 훔쳤던 배우 남상미 등 여러 손님이 함께 했다.
고사의 마무리는 20년 가까이 그와 동고동락했던 조철현 타이거픽처스 대표의 몫이었다. "좋은 영화 열심히 만드는 게 정 대표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떠들썩하면서도 숙연한 분위기 속 사무실 벽에 걸린, 20이라는 숫자가 선연한 액자가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영화가 만들어낸 시간은 오래도록 지속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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