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9일을 흔히 국치일(國恥日)이라 부른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하는 치욕을 당한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평화롭게 사는 나라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잘못이냐, 힘이 없어 빼앗긴 것이 잘못이냐를 따지면 빼앗은 것이 절대적으로 잘못한 것이다. 따라서 일제의 무도한 행위를 막지 못한 것을 부끄럽다고 하기보다, 조선을 강탈한 일제의 도적질에 크게 분노해야 마땅하다.
일제 도적질 분노할 일
따라서 이날은 국치일이 아니라 대분일(大憤日)이라고 해야 더 타당하다. 그런데도 일본은 지난 잘못을 정당화하는 역사 왜곡을 교과서를 통해 확산시키고 있다. 우리와 이웃으로 지내면서도 진정으로 우린(友隣)관계로 대하지 않는 행태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세계의 흐름에 대비하지 못한 탓에 외세 열강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의 날카로운 이빨에 물렸다. 1905년의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바로 그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계속 시도하다가 러일전쟁을 구실로 용산에 일본군사령부를 설치하고 1905년 일본 헌병대가 서울 치안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 병합의 야심을 품고 '대한국황실위문특파대사'라는 직함을 들고 현장 지휘자로 입국했다.
이토는 일본 군대로 궁성을 에워싸고 위압적 분위기를 조성한 뒤 11월 18일 새벽 1시경에 조선 대신들에게 을사늑약 체결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이때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는 반대했으나,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농상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찬성했다. 이들이 을사 5적신(乙巳五賊臣)이다. 특진관 조병세(趙秉世)와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 은 이에 항거하여 자결하고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순국했다.
1907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비밀외교를 전개한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정미(丁未)조약을 맺어 조선 군대를 해산시켰다. 여기에 앞장 선 일곱 적신(賊臣)은 이완용 송병준 이병무 고영희 조중응 이재곤 임선준이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를 주살(誅殺)했지만, 1910년 일본은 다시 일본군을 배치시킨 상태에서 합병조약을 강제했다. 이완용 윤덕영 민병석 고영희 박제순 조중응 이병무 조민희가 경술(庚戌)년의 여덟 국적(國賊) 이다.
나라를 배반하고 동포를 적에게 팔아 먹은 이 흉적들은 조국이 광복을 이룬 뒤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2005년에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그들이 후손에게 남긴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게 되었으니 만시지탄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가 남긴 문제는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1905년부터 1910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체결을 강제한 조약은 모두 불법이고 정당성이 인정할 수 없어 무효이다. 1965년 체결한 한일기본관계조약 제2조도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1905년부터 1910년까지의 조약이 모두 합법적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릇된 역사기록 고쳐야
내년이면 일본의 조선 강탈 100년이 된다. 한국의 역사학자, 국제법학자 등 모든 이들이 일제의 조선 강탈을 위한 조약이 모두 무효임을 주장하고, 일본이 이를 인정하도록 해야 한다. 학자들은 학술회의를 열어 역사적 사실을 학문적으로 증명하고, 국민은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정부는 일본과 교섭하여야 한다. 그릇된 역사의 기록을 방치하는 것은 선조들에 죄를 짓는 일이다.
정종섭 서울대 교수 · 새사회전략정책硏 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