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민주당은 국민적 애도에 힘입어 고인의 덕을 보겠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 때도 빠졌던 유혹이다. 봉하 마을과 하의도를 오가며 유지를 이어받겠다고 다짐하는 민주당의 애달픈 노력이 딱하게 보인다.
후계자 경쟁, 정통성 경쟁은 더 어이가 없다. 후계자 경쟁에 나섰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어떻게 감히 김대중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건지 용기가 놀랍다. 또 무슨 연고로 정통성 운운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이 시점에서 후계자니 정통성이니 하는 것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대정신을 꿰뚫었던 김대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를 치르며 새삼 확인한 것은 그가 한국 현대사에서 몇 안 되는 거목이었다는 사실이다. 신문 방송들이 특집으로 엮은 그의 생애는 보는 것만으로도 질릴 만큼 다사다난(多事多難)했다. 시련과 영광, 좌절과 성취로 가득 찬 생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시대정신과 미래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시련이 클수록 자신을 더욱 연마하는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가 혹독한 독재로 국민을 채찍질하며 경제기적을 이뤄갈 때 김대중은 "민주주의 없는 경제발전은 안 된다"며 싸웠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독재의 긴 사막을 걸어가던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신기루일 뿐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사막 저 너머를 보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민주화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는 박정희와 김대중을 통해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전진했다.
박정희와 김대중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정적이었다. 김대중은 납치되어 바다에 던져지기 직전 기적적으로 살았고, 박정희는 민주화의 동이 트는 불안함 속에서 부하의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박정희의 탄압이 김대중을 민주화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후 박정희의 경제 발전 공로를 인정하고 박정희 기념관을 지원한 것은 그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진정한 정적이며 경쟁자였음을 말해 준다.
김대중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흘러갔다. 이제 민주당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보정당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김대중에게서 물려받을 것은 "누구를 중심으로 당이 단결해야 한다"는 식의 '유훈'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읽고 미래를 예측했던 그의 통찰력,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강한 신념이다.
노동당을 극좌에서 중도로 바꿔 집권하고 10년 간 총리직을 맡아 성공적으로 영국을 이끌었던 토니 블레어를 연구해 볼 만하다. 토니 블레어는 극좌와 극우를 잘 버무려 국가정책의 완급을 분명히 제시하고, 노조에 휘둘리던 노동당을 중산층의 당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교육 예산을 크게 늘리고, 직업훈련을 강화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고, 의료보험 개혁과 감세 정책을 폈다. 영국의 실업률은 지난 30년간 최하로 떨어졌고 경제규모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능가하게 됐다. 노동당은 12년째 장기 집권하고 있다.
민주당, 현실 직시하는 용기를
"미래로 나아가려면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블레어는 말했고, "영국은 국가에 공헌하는 사람들의 나라다"라는 말도 했다. 오늘 민주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다. 살아서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전직 대통령들이 죽어서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냉정하게 판단하고 빨리 국회로 돌아가야 한다.
교육 개혁 하나라도 깊이 파고들어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무조건 평준화를 주장할 게 아니라 서민들이 어떻게 교육을 통해 꿈을 이루고 계층이동을 할 수 있는지 공교육 강화방안을 연구해야 한다. 김대중의 후계자는 필요없다. 이 시대에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지금 필요한 것은 시대정신을 읽을 줄 아는 야당,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가진 야당이다. 민주당 의원들이 계속 거리를 헤매고 다니지 않고 국회에 등원하기로 결정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장명수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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