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거리는 버스 안. 무릎에 기댄 코흘리개 아들을 스다듬으며 차창 밖을 마냥 바라보는 아낙이 있다. 그의 손에 쥔 건 돈벌러 나선 남편으로부터 오랜만에 받은 하얀 편지봉투다. 남편은 강원 영월 탄광에 일자리를 잡았고 집도 얻었으니 어서 오라고 했다. 포장도로를 벗어난 버스는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끝없이 오르는 버스를 탄 아낙은 저 높은 산꼭대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앞이 깜깜해졌다. 날은 어두워졌지만 버스는 멈추지 않았다. 산마루를 넘어서자 갑자기 저쪽 산능선에 휘황한 불빛이 번쩍거렸다. "아니 이런 산속에 저렇게 화려한 도시가!" 아낙의 가슴은 쿵광거렸다.
불야성의 마을 안에는 극장과 요정 당구장들로 번쩍거렸다. 마중 나온 남편과 모처럼 밤을 보낸 아낙은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바람을 쐬러 나온 아낙은 또 한번 놀랐다. 그 화려했던 도시가 다 사라지고 말았다. 고층빌딩이라 생각했던 건물은 비탈에 층층이 들어선 사택들이었다. 발 아래론 잿빛의 판자집들이 가득했다.
허망함을 추스린 아낙은 일찍 문 연 가게가 있기에 밥그릇, 냄비 등 급하게 필요한 세간살이 좀 마련해 되돌아 가려는데 집을 못찾겠다. 똑같이 생긴 사택들. 문 앞에 붙어있던 번호를 기억하지 못한 게 불찰이었다. 탄가루 자욱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아낙의 눈에선 까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1960, 70년대 강원 영월군의 하동면 주문리 모운동 마을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해발 1,087m 망경대산의 7부 능선에 들어선 모운동 마을. 설마 저 높은 곳에 마을이 있을 지 아무도 기대치 않는 '하늘 위의 마을'이다. 지금은 32가구 50여 명이 적을 두고 있지만 한창 탄을 캐던 시절에는 1만명이 북적이고 흥청거렸던 탄광촌이다.
별표 연탄으로 유명했던 옥동광산이 있던 곳이다. 당시 2교대 수업이 진행됐던 모운초등학교의 교기는 곡괭이와 연필이 크로스 된 모양이었다고 한다.
1950년대 중반부터 탄을 캐기 시작해 89년 4월 폐광될 때까지 산골 모운동은 웬만한 도시 부럽지 않은 곳이었다. 시골 마을은 당구장 요정 이발소 약국 목욕탕에 번듯한 극장까지 갖췄다.
산 아래 사람들이 영화를 보러 모운동으로 기어 올라왔고 유랑극단은 영월읍은 안들려도 모운동은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 모운동을 찾았다. 광부 월급날이면 마을엔 그야말로 큰 장이 열렸고 사방 각지서 팔 물건을 든 상인들이 몰려들던 때 이야기다.
하지만 석탄이 메마르면서 마을도 함께 말라갔다. 결국 89년 옥동광산이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마을도 그렇게 스러져갔다.
그리고 20년 침잠의 시간이 흘렀다.
잿빛 상처를 지닌 모운동이 화려한 동화마을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주민들은 허름한 담벼락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골목골목에 꽃을 심고 나무를 심었다. 마을 구판장 건물엔 연통 막걸리통을 주워 만든 비행기 모형이 내걸렸고, 탄광촌 시절 쓰던 생필품들을 모아 번듯한 자료관도 만들었다.
18년째 이장을 맡고 있는 김흥식(55) 씨와 부인 손복용(47) 씨가 앞장서고 주민들이 적극 도와 광산의 먼지를 털고 마을을 변신시키고 있다. 2살때 광부인 아버지 손을 잡고 마을에 들어왔다는 김 이장은 "고향을 그냥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면사무소, 군청을 찾아 다니며 아름다운 마을 가꾸기 예산 얼마를 타왔고, 마을에 그림을 채워 넣기로 했다. 그 예산으론 화가를 부를 수가 없었다. 이때 어린이집 교사 경험이 있고 동화그림을 제법 그렸던 아내 손 씨가 나섰다.
벽면에 손 씨가 밑그림을 그리고 각 부분에 빨강 파랑 노랑 등 들어갈 색을 적어 놓으면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와 색을 칠해 그림을 완성시켰다.
개미와 베짱이,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미운 오리 새끼, 토끼와 거북이 등 눈에 익은 친근한 캐릭터들이 벽면을 채워나갔다. 산골 폐광촌인 모운동은 지난해 행자부가 선정한 '참 살기 좋은 마을 가꾸기' 대상 수상 8마을에 들어가는 기적을 보였다.
촌스러움과 정이 가득한 마을이 주민들이 꿈꾸는 모운동이다. 마을 곳곳에 복숭아, 살구, 진달래 나무를 잔뜩 심었다.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을 차린 꿈 같은 고향을 만들기 위해서다.
동화 그림과 화려한 꽃들이 수놓은 곳이지만 벽화와 꽃이 없더라도 마을은 그 자리한 위치 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 하늘 위 마을 모운동은 그 이름처럼 구름을 불러 모은다. 비온 직후나 봄, 가을의 이른 아침, 마을을 둘러싼 첩첩 산자락에선 안개 구름이 피어 오를 땐 선경이 따로 없다. 동화 속 마을을 꿈꾸는 모운동은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다운 동화 속에 들어있었다.
영월=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영월 모운동, 황홀한 트레킹 코스로
모운동이 주민들의 구슬땀으로 아름답게 변신했다면, 마을 주변 채탄의 흔적은 긴 시간 초록의 자연이 지워냈고 덮어갔다. 노동의 길이었던 운탄로가 이젠 황홀한 트레킹 코스가 돼 마을을 찾은 이들을 맞는다.
지금은 펜션이 돼버린 폐교 뒤쪽엔 산허리를 두르는 산책로가 있다. 옛 탄광 철로가 있던 길이다. 약 3km 되는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주민들이 '그랜드캐년'이라고 자랑하는 깎아지른 벼랑을 만날 수 있다.
남편의 편지봉투를 손에 쥔 아낙이 산을 넘어 모운동을 찾아왔던 그 길도 숲길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훌륭한 트레일이다. 아낙이 왔던 그 길을 거꾸로 걸어보기로 했다. 고맙게도 이장이 동행을 해줬다.
마을 위로 난 운탄길을 구불구불 오르면 싸리재 입구다. 옥동광산이 처음 시작한 곳이다. 그 곳의 바닥은 아직도 탄가루로 거무튀튀했다. 이곳에선 빗자루로 윗 흙만 쓸어내면 바로 삽으로 석탄을 캘 수 있었다고 한다. 처음 마을이 형성됐던 곳으로 그 조그만 터에도 방앗간 이발소가 있었다고 한다. 한쪽 구석의 집터는 당시 다이너마이트를 보관하던 화약고 자리다.
싸리재 입구에서 서쪽의 숲길로 접어드니 완전히 밀림이다. 사람이 다녀간 지 몇 년이 지났는지 수풀이 무성했다. 수풀의 터널 속으로 천천히 발을 디뎠다. 가랑이를 스치는 풀이 길었지만 제법 걸을 만 했다.
수풀 터널의 끝에 망경산사라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사찰을 만났다. 절 앞에는 거대한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다. '만봉불화박물관'이 지어진단다.
사찰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수라리재 대신 자령치를 넘었다. 길은 넓어졌고 길 가는 새로 한 석축공사로 깔끔했다. 시멘트 대신 바닥의 돌들을 쌓아 올려 만든 석축이라 보기가 좋았다. 인적 드문 길에선 들꿩이 총총 걸어 다녔고 다람쥐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서있었다.
이곳엔 모운동 주민들이 나물을 캐러 많이 온단다. 지대가 높고 북향인 이 골짜기의 나물이 부드럽고 향이 좋다고 한다.
비안개에 휩싸인 소나무의 기품 어린 풍경에 넋을 빼놓기도 했고, 수풀 속에 피어난 아름다운 야생화에 반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도 했다. 몇 구비 돌았을까. 시원한 물줄기가 나타났다. 궁장동골 계곡이다.
청정의 계곡이 길을 내내 함께 했다. 이마에 돋던 땀방울이 물소리에 그만 휘발해 버렸다. 아름다운 계곡과 노닐다 보니 어느덧 영월읍 연하리 마을. 옛 38번 국도를 만났다. 모운동을 찾은 아낙이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넘던 그 길은 지금 초록의 휘파람만이 가득했다.
영월=글·사진 이성원기자
■ 여행수첩/ 모운동
●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제천에서 영월까지 38번 국도를 타고 간다. 영월 읍내를 지나 봉화로 향하는 88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 옥동천을 거너는 주산교를 건너 산길을 4km 가량 오르면 모운동이다. 38번 국도를 타고 석항까지 가서는 수라리재를 넘어 중동을 거쳐 거슬러 오르는 길도 있다.
● 모운동의 안개 끼는 전경을 담기엔 이웃마을 예밀리로 향하는 길 가 '서로농장' 부근이 좋다. 모운동에서 망경선사를 거쳐 연하리까지 내려오는 트레킹 코스는 약 15km 4시간 가량 걸린다. 급한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없어 쉽다.
● 마을 구판장에선 앞으로 마을을 찾는 이들을 위해 국수 등 가벼운 먹거리를 준비할 계획이다. 민박 가능하다. 김흥식 이장 (033)374-9549
● 마을 구경과 숲길 트레킹을 함께 원하는 이들은 여행상품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승우여행사는 30일과 9월 5,6일 당일 일정의 모운동 트레킹 상품을 진행한다. 참가비 4만3,000원. (02)720-8311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