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닷새는 빙벽에 매달려 자면서 견뎌야 할 것 같군."
지난 22일 오후 충북 청주시 방서동 충북산악연맹 사무실에 모인 '직지원정대' 대원들의 표정은 자못 심각했다. "해외 사이트를 아무리 뒤져봐도 북서벽에 대한 정보가 없어요. 달랑 이 사진 하나 뿐입니다." 박종성(43) 대원이 깎아지른 빙벽 사진을 내놓자 김홍(39) 대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현지에 가서 지형을 살핀 뒤 (등반)코스를 찾는 수밖에 없겠네요."
원정대장인 박연수(46) 충북산악구조대장이 대원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번 등반은 금속활자를 창조한 우리 조상의 도전 정신을 알리기 위한 거니까 자부심을 갖고 힘냅시다. 뭐든 맞닥뜨려 헤쳐 나가자고!" 순간 구릿빛으로 그은 산사나이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27일 출국하는 '2009 직지원정대' 11명의 도전 대상은 네팔 포카라 지역에 있는 히말라야 히운출리(해발 6,441m) 북서벽 코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암벽과 빙하벽이 1,500m나 수직으로 이어진 고난도 코스다.
지금까지 세계 어느 산악팀도 이곳으로 등정에 성공한 적이 없다. 원정대는 전인미답의 이 코스로 정상에 오른 뒤 '직지 루트'라는 이름을 붙일 계획이다. 새로 개척한 등반로 명칭은 등정 성공 후 네팔 정부와 세계 산악계에 보고하는대로 정식으로 명명된다.
직지원정대의 도전 방식은 8,000m급 고봉을 추구하는 일반적인 등반과 사뭇 다르다. 소수의 인원으로 고정로프를 이용하지 않고, 셰르파 등 현지 고용인 도움도 없이 오르는 알파인 방식이다. 높이보다는 어렵고 험난한 코스를 찾는다.
정상에 선 순간보다 등반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다. 박 대장은 "아무도 가지 않은 곳을 오르는 모험 정신이 금속활자를 만든 조상의 창조 정신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해 어려운 벽 등반을 택했다"고 말했다.
대원들은 이번 도전을 앞두고 수십 ㎏의 짐을 지고 하는 '하중 훈련'에 집중했다. 셰르파 없이 스스로 짐을 지고 길을 찾다 보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두 번씩 팀워크 훈련도 병행했다.
원정대는 9월 7,8일께 해발 4,300m 지점에 베이스 캠프를 차린 뒤 빙벽의 모양과 위치 등 지형을 면밀히 살펴 루트를 찾을 계획이다. 코스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만큼 시간을 충분히 두고 가장 확실한 길을 모색하기로 했다.
9월 말~10월 초로 예정된 정상 공격에는 민준영(36) 등반대장과 박종성, 박수환(39) 대원 등 서너 명이 나선다. 이들은 수백 m 빙벽에 매달려 잠을 자고 막대 초콜릿 2,3개로 하루를 견딜 수 있는 벽 등반 베테랑이다.
특히 민 대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거벽 등반의 선두 주자다. 그는 지난달 중순 수직 고도가 2,200m나 되는 파키스탄 북부 히말라야 스팬틱골드피크(7,027m)를 60시간의 사투 끝에 올라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민 대장은 "빙벽 등반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면서 "중도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스스로 이겨내는 식으로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직지원정대가 탄생한 것은 2007년 초. 청주에서 간행된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가치와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충북 산악인들이 뭉쳤다.
"직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는데 유럽 미국 등에서는 아직도 독일의 구텐베르그 활자를 최초의 금속활자로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직지의 존재를 우리(산악인) 방식대로 일리고 싶었습니다."(박연수 대장)
충북산악구조대 중심으로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에 직지 이름을 새기는 원정대가 꾸려졌고, 첫 걸음으로 그 해 7월 파키스탄 북부 카라코람 산군에 있는 이름없는 봉우리(해발 6,235m) 정복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예기치 못한 산사태를 만나는 바람에 정상 150m를 남겨 두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원정대는 베이스 캠프에 직지 상징물을 새긴 동판을 세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심기일전한 원정대는 지난해 6월 재도전에 나서 이 봉우리에 직지 깃발을 꽂는데 성공했다. 곧바로 파키스탄 지명위원회를 거쳐 봉우리는 '직지'로, 정상까지 오른 길은 '직지 루트'로 명명됐다. 파키스탄 지도와 세계 산악지도에도 직지봉이 기록됐다. 히말라야에 한국어 이름이 최초로 새겨진 순간이었다.
27일 히말라야로 향하는 '2009 직지원정대'에는 10여명의 청주 시민들로 꾸린 '직지 사절단'도 동행한다. 사절단은 원정대와 베이스 캠프까지 함께 하며 대원들을 응원하고 전세계에서 온 산악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직지를 홍보할 계획이다. 또한 현지 오지학교를 돌며 네팔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 활동도 펼친다.
박연수 원정대장은 "직지에 담긴 우리 조상의 개척ㆍ창조 정신을 히말라야 설산에 새겨 전세계 사람들이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청주=한덕동 기자 dd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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