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이(클리닝) 맡겨!" 기름 얼룩, 정체 모를 오물, 누렇게 찌든 때, 번진 잉크, 심지어 혈흔 등 옷에 원치 않는 얼룩 때가 묻으면 의레 내려지는 처방이다.
하지만 드라이에 대한 이런 기대가 무너질 때가 종종 있다. 클리닝을 했음에도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다. 더구나 값 비싼 옷을 맡겼는데 옷이 상했거나 분실됐을 경우 동네 세탁소 주인을 상대로 소송을 할 수도 없고, 난감하기 이를 때 없다.
고의로 그런 건 아니지만 답답한 노릇이다. 이를 막기 위해 세탁전문기업들은 오래전부터'오염제거(스파팅ㆍSpotting) 전문가'를 두고 있다. 대리점 1,200여 곳을 거느린 크린토피아의 옷 때 벗기기 베테랑 정양진(47) 주임, 박성민(37) 대리를 만났다. "세상에 못 지울 때는 없다"는 명장(名匠)의 숨결을 느껴보자.
상한 의복을 수술하는 집도의
스파팅 기계는 실망할 만큼 단출하다. 오염을 제거하는 10여 종의 약품은 기발한 성능을 감안하면 초라한 용기(병)에 담겨있다. 명장의 말솜씨도 잔뜩 주눅 들어있다. 그러나 속까지 녹이 스민 흰색 여성용 블라우스가 기계 위에 눕자 환하게 변했다. 마치 긴박한 수술실에서처럼.
정 주임이 환부에 스팀(증기)을 뿌린 뒤 오염상태를 또박또박 설명한다. "소재는 면, 금속성 녹, 장기간 지속, OO약품(약품이름은 대외비) 수 차례 처리 필요." 스포이트로 한 약품을 떨어뜨리더니 스폰지로 살살 문지른다.
"역시…" 쉽지 않은 듯 다시 스팀을 하고 다른 약품을 바른다. 이번엔 붓질이다. 웬걸 오염 부위가 까맣게 변색된다. '어, 옷이 더 망가졌네'하고 생각하는 순간, 다른 처방을 하자 선명하던 녹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옷 색도 돌아왔다. 면봉으로 깔끔한 마무리도 잊지 않는다. 손놀림이 어찌나 정교한지 외과의사나 화가 같다. 함께 빤 탓에 짙은 옷의 색이 밝은 옷에 지저분하게 스며드는 이염(移染)도 말끔히 없앤다니 놀랍다.
해당 약품만 알고 언뜻 흉내만 내면 집에서도 가능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오염제거는 시간 및 자신과의 싸움'이란다. "섬유 관련 지식, 약품처리 용량, 미세기법(붓질 두드림 등) 등 섬세한 노하우 및 기술은 머리와 손이 어우러져야 하고, 한번 실수로 옷이 완전히 망가질 수 있어서 전문가도 두려워하는 오염이 많다"고 정 주임은 말했다. 박 대리가 옆에서 "세탁 선진국 일본 연수를 비롯해 12년 내공이 서린 손 맛"이라고 거든다.
잉크 자국에 스민 비밀
"드라이만 하면 깨끗할 것"이란 그릇된 상식부터 버리란다. 오염의 성질부터 살펴야 한다. 의복 오염은 수(水)용성과 유(油)용성으로 갈리는데, 드라이클리닝은 유용성 때만 벗겨낸다. 탄닌계(주스 커피 와인 등)와 단백질계(우유 계란 육류 등) 등으로 나뉘는 수용성 때는 드라이 후에도 빠지지 않아 재차 작업(물세탁)이 필요하다.
옷의 태생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의복용 섬유는 줄잡아 10가지가 넘는다. 면 마 모 실크(천연) 레이온 아세테이트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아크릴 폴리우레탄 금속섬유 가죽 코팅(합성) 등. 심지어 섬유먼지의 종류도 살펴야 한다. 같은 때라도 소재가 다르면 약품을 달리 써야 한단다.
예컨대 음식물 오염에 주로 사용하는 약품을 썼다 치자. 다른 섬유와 달리 레이온 실크 마로 짠 옷은 때가 사라지는 대신 옷의 색도 바랜다. 태생을 살피지 않고 오염과 약품의 상관관계만 달달 외웠다간 옷에 구멍을 내거나 더 큰 오염으로 번질 수 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울 수 있다는 얘기다. 각종 의류 소재를 공부했던 박 대리의 한국의류시험연구원(1994~2000년) 이력이 귀히 쓰일 수밖에 없다.
볼펜이나 만년필의 잉크가 터져서 번진 오염은 특히 어렵다. 잉크 속 여러 성분을 차근차근 정교하게 지워야 하는 복합오염이기 때문. '휘발 성분→기름 얼룩→수용성 색소→철분 때'로 이어지는 제거작업은 한편의 드라마다. 그냥 잉크 자국이라고 부르는 건 이들의 노고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무엇보다 옷장에 쳐 박히는 바람에 누렇게 누른 때는 '세탁의 달인'도 어찌할 도리가 없단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파손될 위험이 높아 고객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정)는 것. 오죽하면 "때가 탄 옷은 보름 안에 세탁소에 맡기라"는 게 지론이다.
세탁업에 대한 인식 아쉬워
경력은 다소 다르지만 둘은 평범한 주부였다. 그 시절 빨래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시동생 세명의 교복은 칼같이 다려 시골(홍천)에서 칭찬 받았다"(정)는 정도. 12년차 정 주임은 입사해 다림질부터 했고, 3년차 박 대리는 관련 경력(의류시험연구원)을 인정받아 발탁됐다.
시행착오와 사고(회사가 보상했다)도 많았다. 도저히 빠질 ?같지 않은 때를 뺀 뒤 느끼는 희열,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은 오염에 대한 도전이 이들을 숨쉬게 했다. "값비싼 명품 의류에 묻은 오염이나, 빨다가 이염된 옷 등 세탁소마저 포기한 오염을 말끔히 지우고 나면 스트레스마저 지워진다"고 했다. 물론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지워지지 않을 때는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남는다.
먼지와 삼복더위에도 에어컨을 켤 수 없어 늘 후텁지근한 공장환경은 견딜만하다. "세탁업 하면 허드렛일이나 하는 걸로 여기고 일단 무시하는 선입견이 서운하다"고 박 대리는 귀띔했다. 최적의 세탁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모습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옷에 묻은 때도 시대흐름을 탄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땐 맥주 얼룩이 그리 많더니, 요즘엔 화장품 자국이 묻은 남자 옷이 눈에 띈단다. 화장하는 남성들이 늘었다는 얘기다.
▦오염제거 전문가가 귀띔하는 옷 때 빼기 비법
1. 빨래 전 세탁 케어라벨을 살펴라/실크 나일론 모 아크릴 소재가 혼방된 옷은 흰색이라도 락스에 담그면 누래진다
2. 음료수나 커피 등이 묻으면 미지근한 물에 주방세제를 풀어 살살 문지르며 빨아라
3. 볼펜 똥(혹은 잉크)이 찍히면 물파스를 발라라/물파스의 알코올과 글리세린 성분이 웬만한 얼룩은 제거
4. 반짝이는 소재(아세테이트)에 매니큐어가 떨어졌다고 아세톤으로 지우면 구멍 난다
5. 실크나 레이온 소재 옷은 식당에서 쓰는 물수건이나 티슈의 접촉을 삼가라/표백성분 때문에 탈색된다
6. 오리털 소재 옷(이불)은 드라이보다 물세탁이 훨씬 깨끗하다
7. 찌든 때는 귀찮더라도 꼭 비누로 솔질(애벌빨래)부터 하라
8. 열에 눌린 자리는 중성세제를 물에 타 담가두면 감쪽같이 사라진다
☞ 단 모두 긴급처방일 뿐, 오염이 발생하면 가까운 세탁전문점을 찾는 게 가장 현명
고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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